[고사성어로세상보기] 一期一會 (일기일회)
일생에 단 한번 만나는 인연
봄비다. 봄비가 바람을 시켜 새벽 단잠을 깨운다. 눈을 떠보니 아직 어둠이 짙다. 이른 새벽 불일암 법정스님을 뵈러가고 싶다. 주저 없이 집을 나섰다. 혼자 갈까 하다가 둘이라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각화동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 친구. 송광사에 다녀오세.” 앞뒤 없이 내지르는 무례에도 친구는 “이 사람이 새벽부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아니 그냥 비도 오고 마음도 우울해서 그러네. 자네 동네 느티나무 슈퍼있제, 그리로 나와. 꾸물대지 말고….”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정말로 행복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꼭두새벽부터 먼 길을 가자고 불러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함께 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차안에서 담배를 피워 물던 친구는 “이 사람아 씻을 시간이라도 좀 줘야지.” 처음에는 나의 무례함에 약간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봄비 내리는 새벽에 단 둘이 떠난다고 하니 `역시 너 답다’고 말한다. “친구야, 그러니 이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은 우리는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서로 의지하며 살자”며 차창 밖으로 담배연기를 깊게 내 뿜는다.
석곡 인터체인지를 지날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어둠이 밝아오는 산야에 취했다. 친구가 침묵을 깬다. 안개가 자욱한 산을 가리키며 “저토록 자연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데 변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값진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있어야 한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살려면 이제부터라도 언제나 뒤를 돌아보며 살세.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네”라고 말한다.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아직도 내 맘과 주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송광사다. 기왓장이 내린 비로 더욱 검게 보이는 대웅전 지붕위로 바람이 비를 몰아가고 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산사는 고요하다. 산수동이 집이고 광산김씨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젊은이는 연신 카메라로 비 내리는 산사의 정취를 담느라 정신이 없다.
“불일암은 어디로 가나요.” 젊은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목숨을 내놓고 가지 않으면 어렵소. 그러나 모두를 비우고 간다면 갈 수 있을 것이오.”
어라 이놈 봐라! 젊은이의 대답에 오기가 작동했다. 마음속으로 그래 오르지 못한다니 기어이 올라가야겠다.
가파른 오솔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을 걸었다. 안개 속에 숨어있던 불일암이 반갑게 길손을 맞는다. 댓바람 소리가 정갈하다. 조그만 방 두칸 앞마루엔 인자한 법정 스님이 조용히 일기일회(一期一會)를 말씀하신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라. 일생에 단 한번 만나는 인연이다. 이는 개인의 생애로 볼 때도 이 사람과 이 한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여긴다면 순간순간을 뜻 깊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속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암자 앞 스님이 홀로 살며 가꾸시던 텃밭에는 작은 봄 새싹이 대지를 박차고 올라오고 있다. 저 여리고 부드러운 몸 어디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대지를 뚫고 나올 힘이 숨어있었는지….
민판기<;금계시문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