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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7

    법정스님 은밀한 장학금..입도 뻥긋 못했소 -문현철(한겨레신문 3.16)

본문

“법정스님 은밀한 장학금…입도 뻥긋 못했소”

‘약속’ 깨고 털어놓은 문현철 초당대 교수


한겨레


가톨릭 신앙 ‘개종’ 말리신 분

“천주님 사랑도 부처님 자비도

풀어보면 한 보따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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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철 초당대 교수
 


전남 무안 초당대 문현철(45·사진) 교수는 대중에겐 알려지지 않은 ‘그만의 법정 스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문 교수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교 2학년 때인 1982년 12월 초였다. 시골 중학교에서 전교 1~2등을 하다가 광주에 올라와 떨어진 성적 때문에 말 못할 방황을 하고 있을 때 학교 상담교사가 법정 스님의 책 <산방한담>을 읽어보면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했다. 하룻밤 만에 <산방한담>을 읽은 지 일주일 후 평소 좋아하던 광주광역시 금남로1가에 있는 클래식음악감상실 베토벤에 들렀는데, 그곳에 꿈에도 그리던 법정 스님이 있었다.


바로크시대의 클래식음악을 좋아했던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서 광주에 올라오면 그 감상실에서 지인들을 만나곤 했다. 그는 법정 스님 앞에 앉아 “군인도 되고 싶고, 교수도 되고 싶은데 뭐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돌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님은 “‘무엇이 될 것이냐’보다 ‘어떻게 살 것이냐’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 입문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다음해 3월 다니던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다 1주일 만에 깨어났다. 5월 말 퇴원하자마자 조계산 불일암을 찾았다. 법정 스님은 텃밭에서 딴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별로 표현하는 법이 없고, 잔정을 보이지 않던 법정 스님은 그의 홀쭉해진 몸을 보고 한마디 했다. “다쳤어?” 그뿐이었다.


그는 스님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면 나를 친 차를 붙잡아주지 않고 영세받은 바로 그날 들이받게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법정 스님은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은 아니다”라며 “이런 아픔을 통해 네가 더 성숙해져, 더 큰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는 “무소유 등에 대한 스님의 말씀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늘 희망과 긍정을 일깨우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면서 조선대 법대 1학년 1학기를 겨우 마친 뒤 등록금을 마련 못해 학업을 포기할 지경에 있던 그가 불일암을 찾아갔을 때 스님은 불현듯 “등록금 고지서를 베토벤에 맡겨놓으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졸업 때까지 빠짐없이 등록금을 부쳐준 스님은 그가 추천한 가난한 친구 3명의 등록금도 졸업 때까지 도와주었다. 그러면서도 도움받은 사실을 일절 함구토록 해 지금까지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가 은근히 불교로 개종할 의사를 내비치자 빙그레 웃던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청국장을 좋아하고, 누구는 김치찌개를 좋아할 뿐이지만 천주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는 풀어보면 한보따리다. 그대로 있어라.”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 가톨릭 신앙을 지키면서 그를 스승으로 따를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고향 땅과 많은 지인들이 있는 땅을 떠나 강원도 오지로 들어감으로써 둘의 만남은 이어지지 못했다. 문 교수도 “익숙한 것들을 뒤로한 ‘제2의 출가’ 정신을 존중해 스님을 찾지 않았지만, 스님은 내 마음의 산이었다”고 했다.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