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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7

    비움과 내려놓음과 大자유 -서동훈 (경북일보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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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내려놓음과 大자유


법정스님이 머리 깎을 결심을 한 동기는 6·25동란이었다. "한 핏줄, 이웃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미쳐 날뛰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에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워 묻고 또 물으면서 고뇌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구도의 길에 들어설 당시를 그는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고 회고 했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생활을 했다. 나무 해 오고 군불때고 밥짓고 빨래하고 스님들 잔심부름하고 밤낮 없이 밑바닥 궂은 일 하는 것이 행자의 수행법이다.

법정은 군사정권시절 유신철폐운동에 참여했다. 그때 인혁당사건이 터졌고, 관련자들이 사형 집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가" 이 숙제를 안고 법정은 다시 산속 깊이 들어갔다.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혼자 생각하고 글쓰는 생활 17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스님은 다시 강원도 산골로 들어갔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이었다.



그 무렵 법정은 폐암에 걸려 있었다. 밤중에 기침 때문에 잠 깨는 일이 많았다. 그는 시인인 이해인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한밤중에 일어나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계곡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알고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라 썼다. 법정은 TV대담 때 "어느 산길에서 한 수녀님을 만났는데, 마음이 흔들렸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란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 때문에 이해인 수녀님이 엉뚱한 오해를 받았는데, 사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그후 서로 저서를 교환하며 알게됐고,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합천 해인사에 머물때였다. 할머니 한분이 장경각 쪽에서 내려오면서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지나온 곳에 있지 않습니까" "아, 빨래판 같이 생긴 것 말이지요" 부처님 말씀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빨래판에 불과하다. 불법을 쉽게 풀어서 가르쳐야 하겠다. 그 첫 작품이 '무소유'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천사에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내가 소유하고 싶다"란 글귀를 써넣었다. 법정은 애지중지하던 난초 화분 하나를 햇볕 속에 내놓고 출타했다. 얼마 후 "아차, 난초가 뜨거운 햇살에 타죽겠구나" 그 생각이 났다.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왔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괴롭히는구나.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싸운다" 법정은 '불필요한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글로 써 남기는 일에 매달렸다.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이란 주제였다.



길상사 뜰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은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법정스님과 상의해서 조성한 작품이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왼손에는 정병(精甁)을, 머리에는 화관을 쓴 관음보살상은 '성모상을 닮은 관음보살상'이다.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하고, 성탄절에는 법정이 명동성당에서 설법을 했다. 길상사에는 '맑고 향기롭게' 사무실이 있다. 장학금을 학생에게 전달하고, 장애인과 노인, 청소년 복지센터에 반찬을 지원하고, 숲기행과 생태사찰 탐방 등 자연보전 활동을 한다. 법정은 책을 펴내 상당한 인세를 받았는데, 그 돈을 이 재단에 기탁했다.



법정은 입적하기 전날 밤 "내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데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세상 떠들썩하게 장례식 치르고, 또 사리를 줍는다고 재를 뒤적이지 말라. 나 죽은 다음에 시줏돈 걷어서 거창한 탑 같은 것 세우지 말고, 어떤 비본질적인 행위로도 죽은 뒤에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했다. 돈독 오른 세상에 내려치는 무서운 죽비소리다.


 서동훈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