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 법정' 4글자로 돌아온 師兄"
법정스님과 동문수학한 사형 중 혼자 남은 법흥스님
(순천=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비구 법정'이라고 딱 네 글자만 위패에 써서 돌아왔더라고.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몇 자 더 붙여서 다시 썼어"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열린 13일, 송광사 동당에서 만난 조계종 원로의원인 법흥(法興)스님(79ㆍ동당 수좌)은 같은 은사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형(師兄) 법정스님을 가리켜 "평소 성품대로 돌아왔더라"고 말하며 그리움을 나타냈다.
법정스님은 1954년 근대 한국 불교 최고의 선승 중 한 명인 효봉스님(1888-1966)을 안국동 선학원에서 만나 출가했다. 5년 뒤, 법흥스님도 역시 효봉스님을 은사로 동화사에서 출가했다.
효봉스님은 와세다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생활을 하다 첫 사형선고를 내린 후 생사를 고뇌하다가 38세에 늦깎이로 출가, 치열한 구도의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고 1937년 송광사에 이르러 선방인 삼일암 조실로 10년을 머무른 송광사 문중의 최고어른이다. 그는 1946년부터 5년간은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방장을 지냈고,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에는 초대 종정을 지냈다.
불가에서 같은 은사 아래의 상좌 스님들은 속가의 형제와 같다. 효봉스님의 맏상좌는 1969년 조계총림의 문을 열고 입적 때까지 방장을 지낸 구산스님(1909-1983)이었고, 환속한 시인 고은, 김완일 법사 등도 효봉스님의 상좌였다. 법정스님마저 이번에 입적하면서 스님으로 남은 효봉스님 상좌들 가운데 이제는 법흥스님만 생존해있다.
법흥스님은 13일 법정스님 다비식에도 거화(炬火)봉을 든 스님 9명 중 한 명으로 참석, 형제 같은 사형을 불길 속으로 떠나보냈다.
"법정스님이 1932년 생이어서 나보다 속가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5년 먼저 출가했으니 나의 사형이지. 난 1958년에 고려대 국문과 졸업하고 스물아홉이던 1959년에 대구 동화사에서 중이 됐어. 해인사에서 글을 쓰던 법정스님이 1960년 정월 보름에 내가 있던 동화사 금당에 왔기에 그때 처음 만났어"
"둘이 효봉스님 앞에 불려가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는 추상같은 질문을 받고 쩔쩔매곤 했지. 1961년 해인사 선방에서는 같이 지냈어. 그때 법정스님이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번역본을 냈어. 해인사 있을 때도 만날 신동아, 사상계 같은 잡지를 보고 있더군"
법흥스님은 법정스님을 가리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주지, 삼직(절에서 총무ㆍ교무ㆍ재무를 맡는 스님) 한 번도 한 적 없고 자기 하고 싶은 공부만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당연히 법정스님을 향한 무한한 애정의 반어법인 듯했다. 스님은 법정스님과 친하셨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친하지, 사형인데"라며 웃었다.
법흥스님은 일체의 겉치레와 감투를 싫어하던 법정스님을 회상하면서 "1980년 신군부가 10.27 법난을 일으킨 이후 수습하려고 꾸려진 비상중앙총회에 나와 함께 들어갔던 적이 있지만 그것도 2-3달 하고 그만뒀다"라고 회상했다.
법정스님은 스님들이 법호를 짓는 것도 질색했다고 법흥스님은 소개했다.
"평소 '중이 법명 하나면 되지 무슨 호가 필요하느냐'고 꼬집었어. 내가 '도현'이라는 법호를 지었다고 했더니 질색하면서 혼내더라고. 이번에도 올 때보니 위패에 '비구 법정'이라고 딱 4글자 적어왔어.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서 내가 '비구 법정 대선사 강녕'이라고 몇 자 더 붙여 써서 분향소에 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