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한국불교의 선승(禪僧) 가운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세 사람을 꼽는다면 성철(性徹·1912~1993), 청화(淸華·1924~2003), 법정(法頂·1932~2010)이다. 세 선승은 스타일이 각각 달랐다.
성철은 수사자의 사자후를 토했다. 그 사자후는 바로 돈오돈수(頓悟頓修)였다. 화두를 뚫으면 한 방에 깨달음과 닦음을 모두 얻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내뿜는 불꽃이 하도 강해서 그 옆에다 어영부영 손을 대면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철은 '선문정로(禪門正路)', '백일법문(百日法門)'이라는 선서(禪書)를 통해서 한국 화두선(話頭禪)의 가풍을 지켰다.
말년에 곡성 태안사에 머물렀던 청화는 그 선풍(禪風)이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부드럽고 온화하였다. 그 온화함은 출가 이래 40년이 넘게 깊은 산중 토굴에서 혼자 생활하며 묵언(默言)으로 정진한 데서 우러난 경지였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 본 수행자가 풍길 수 있는 도력(道力)과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다. 청화는 화두선보다는 염불선(念佛禪)을 권하였다. 그가 남긴 '정통선의 향훈', '원통불법(圓通佛法)의 요체'라는 저술에는 그의 수행관이 담겨 있다.
이번에 열반에 들어간 법정은 어떤 선풍이었는가? '무소유선(禪)'이 아닌가 싶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무소유를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깨달음은 다른 게 아니라 무소유였던 것이다. 승려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는 이 '무소유선'이 화두나 염불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강하다. 소유를 하지 못해 안달하는 중생들의 가슴을 무소유라는 시퍼런 취모검(吹毛劍)으로 후벼팠기 때문이다. 소유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고나 할까. 법정의 수필집은 마치 느끼한 돼지고기를 먹은 후에 먹는 새우젓의 느낌과 비슷하였다.
오늘날 미국문화를 그나마 정화시켜 주는 한줄기 맑은 물이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에게서 흘러왔다고 본다면, 돈으로 범벅이 된 오늘날 한국 사람들에게 법정의 '무소유'는 '월든'과 같은 한줄기 세례였다. 160년 전 월든 호숫가에 지었던 소로의 오두막집이 바로 꽃 피고 산새 울던 불일암이었고, 한밤에 소낙비 내리는 소리를 듣던 오대산의 오두막집이었다. 선승 법정은 취모검 같은 대필(大筆)을 휘두르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