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가 가야 하는 길 보여주신 스님,
열반으로 가시는 발걸음 가벼우소서
[법정 스님 추도사] 소설가 정찬주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스님의 속가 외사촌 조카인 현장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님을 길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상경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현장 스님도 목이 메고 저도 목이 멨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온 몸으로 살고, 온 몸으로 죽어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은 초등학교 때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꿈도 꾸어 보고, 청년기에는 인간 실존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동족끼리 피 흘린 6ㆍ25전쟁은 스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속은 스님이 살아야 하는 번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효봉 선사의 제자가 됩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에는 한 아주머니가 장경각의 고려대장경판을 ‘빨래판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스님은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강원을 마치고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합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은사 다래헌에서 사십니다. 현대문학에 ‘무소유’를 발표하시어 문명을 떨치시기도 하고,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투쟁에도 간여합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스님을 몇 달 동안 잠 못 이루게 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가 죄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만행을 보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깊이 자책합니다. 어떤 운동도 인격 형성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가 불일암을 짓고 텅 빈 충만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불일암마저 번다해지자 강원도 산중 오두막으로 가 정진하시는 한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를 창건하시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내면을 조금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 ‘서편제’ 조조 프로를 보시면서 맑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소년기부터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을 견디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거름 삼아 깨달음의 꽃을 피우신 분입니다. 중학교 때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던 스님.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을 떠나기가 아쉬워 울었던 스님.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고방 호롱불로 ‘주홍글씨’를 읽다가 야단 맞고 유난히 좋아했던 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렸던 스님.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서 정진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禪)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맑은 모습 속에 한국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 동자도 만나시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 다한 일들 이루소서.
정찬주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