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께,
조마조마하면서도 설마하던 중에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한동안 그야말로 멍했습니다. 늘 청정하게 사시면서 뉘게나 “맑고 향기롭게” 살기를 가르치신 스님께서, 그래서 도시의 번잡을 늘 부담스러워 하시던 스님께서, 그래서 손수 세우시고 가꾸시던 불일암 조차 훌쩍 떠나 깊은 산골 화전민이 머물다간 오두막에서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새소리를 벗하시던 스님께서 폐암으로 세상을 등지셨다니 너무나도 믿기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중생, 특히 1970년대에 민주화를 갈망하던 중생들의 가슴앓이를 아직껏 홀몸으로 견뎌내신 것입니다. <불교신문>의 주필로,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편집동인으로,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운영위원으로 한국사회와 종교계의 이지러진 모습을 준엄하게 꾸지람하시던 중, 1974년 1월 11일, 아카데미 간사로 있는 제게 보내주신 엽서 한 장이 그 아픔을 말해줍니다. “세월이 나를 못 가게 합니다. 요즘 거의 연금상태입니다. 4~5인의 사복(私服)이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기랄ㅡ내가 무슨 솔제니친이라고.” 스님께서는 시대의 질병을 몸소 겪으시며 아파하셨는데, 그 가슴앓이가 끝내 스님을 우리 곁에서 멀리 있게 만든 것이지요.
그 후 세인들은 어느덧 또다시 일상 속에 파묻혀 뒹굴 때, 스님께서는 더욱 무소유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 나아가는 정진의 세월을 보내시면서 그 가슴앓이를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몸져 누워있었을 때, 병상을 찾아주시고 <보왕삼매론>을 보내주셔서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나이다.”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던 스님께서 가슴앓이쯤 이겨내지 못했을 리 만무인즉, 아무래도 그 질병은 중생들이 더 맑고 향기롭게 살게 하시려고 스스로 짊어지신 형벌임에 틀림없습니다. 온갖 탐욕과 비리, 불의와 부정, 억압과 착취로 인해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위해 고통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외면당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스님의 마음은, 스님께서 봉은사에 계실 때 성탄절날 사람들이 예수는 떠받들면서 산고를 겪은 성모는 소홀히 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시면서 서안 한 귀퉁이 모셔놓은 백색의 성모상에 촛불을 밝혀주시던 그 마음은 이제 길상사의 성모 같은 관음상으로 되살아나 서러운 사람들을 달래줍니다.
스님께서는 죄인임을 자책하는 기독교인들을 보시면서 그대들이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와 함께 부활한 존재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래야겠지요.
그러나 스님!
스님의 고희를 기리고자 70년대를 살아오면서 남은 졸작 시문들과 스님께서 보내주신 서신들을 한데 묶은 책자 <눈이 맑은 아이>를 기꺼워 하시면서도 띠동갑인 제게 잔나비들은 재주가 많으니 삼가야 한다고 다정하게 일러주시던 육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이 허허로움은 어찌 해야 합니까? 어제 홑이불을 덮으신 채 단정히 누우신 마지막 모습에 삼배하며 흐느끼는 중생들의 오열은 어찌해야 거듭나겠는지요.
스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꽃피고 움트는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서러움들이 스님과 저를 처음 묶어주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길들인 장미꽃으로 피어날 것을 믿어야 하겠지요.
스님께서 편지마다 즐겨 써주셨던 인사를 이제 스님께 되돌립니다.
“부디 청안(淸安)하십시오.”
불초 김문환
서울대 명예교수 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