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법정스님 책 5만권씩만 추가 발행
2010 04/27ㅣ위클리경향 872호
ㆍ유언 따라 절판 결정 후속 대책… 연말까지 판매 후 전량 회수
법정 스님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가 한국출판인회의 집계 기준으로 연속 5주째(4월 9~15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또 <무소유>(범우사), <일기일회> <산에는 꽃이 피네> <인연 이야기>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상 문학의숲),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맑고 향기롭게>(이상 조화로운삶), <오두막 편지>(이레), <홀로 사는 즐거움>(샘터) 등 스님의 저서 10권이 베스트셀러 20위권 가운데 절반을 차지했다. 해당 출판사들은 갑작스런 절판 결정에 대응하면서 쏟아지는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고, 출판계는 스님 책 때문에 종이값이 치솟는 ‘낙양의 지가’를 실감한다면서 울상이다.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절판 결정 앞에서 독자나 출판계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 법정 스님 입적 이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추모 코너에서 독자들이 스님의 책을 고르고 있다. |강윤중 기자
베스트셀러 20위 내 절반 차지 화제
평생 수십 종의 책을 썼고, 독자들이 자신의 책에서 교훈과 위안을 얻는데 기쁨을 느낀 법정 스님의 절판 결정은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스님은 마지막 2년 동안 자신의 책을 집중적으로 출간한 문학의숲 출판사를 통해 입적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편집부 엮음)이란 신간을 냈고, 일본 작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와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 강의>의 서문도 구술한 상태였다. 그러나 스님은 병세 악화로 지난 2월에 들어오면서 정신이 자꾸 혼미해지자 2월 24일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만드는 자리에서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입적한 뒤 스님 저서를 다시 읽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가운데 엿새 뒤인 17일 유언장 내용이 공개되자 책에 대한 수요가 빗발쳤다. <무소유>를 출간하던 범우사는 스님의 유지를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즉시 출고를 중단했다. 그러자 3월 26일 인터넷 오픈마켓 옥션에서 스님의 1993년판 <무소유>가 원가 1500원의 700배인 110만5000원에 낙찰되는 일까지 생겼다.
시장에서 혼란이 생기자 저작권을 승계한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는 스님 책을 내는 5개 출판사 대표들과 함께 협의를 갖고 4월 1일 후속대책을 내놓았다. 스님의 뜻을 존중하고 독자의 권리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현재 시중에 유통 중인 스님의 책 20여 종에 대해 오는 4월 28일까지 종당 5만권 상한선을 정해 ‘맑고 향기롭게’ 측이 인지를 발행한다는 것이다. 또 출판사는 7월 말까지 해당 분량 안에서 책을 출판해 올해 말까지 서점에서 판매하고 그 이후로는 전량 회수하는데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이미 인쇄를 마친 재고분 외에 5만권 이내에서 추가 발행이 가능해졌다.
‘맑고 향기롭게’의 한 관계자가 3월 17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의 유언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김자경 ‘맑고 향기롭게’ 사무국장은 “스님 입적 이후 장례절차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며, 3월 17일 이사회에서 스님의 유서가 공개되면서 책의 저작권을 법인이 승계한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절판 발표 이후 스님의 책을 구하지 못해 혼란이 빚어졌으나 법인 입장에서는 이사회와 출판사 간에 합의를 끌어내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김 국장은 이번 결정에 대해 “49재가 끝나는 4월 28일까지는 스님이 아직 우리 곁에 계시다는 전제 아래서 인지를 발행하는 것”이라면서 “출판사들과 협의한 상한선 내에서 책이 출간되면 어지간히 시장의 수요를 맞출 수 있고, 더 이상 출간되지 않더라도 도서관마다 책이 충분히 있으므로 누구나 뜻이 있으면 스님의 책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맑고 향기롭게’는 방송작가인 윤청광씨, 이계진 의원(한나라당), 현장 스님, 사업가 변택주씨 등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중심으로 스님의 장례식 및 유언 집행 등 관련 사항을 정리하고 있다. 이곳은 책의 절판 절차를 관리하고, 법정 스님의 책이 주목을 받으면서 스님의 저서와 유사한 제목으로 유통돼 혼란을 주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등 책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는 등 스님의 책이 시장에서 순조롭게 사라지도록 마무리하고 있다.
“50년 후 저작권 소멸 재출간 가능”
한편 절판 결정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절판을 결정할 일이었으면 스님이 왜 마지막까지 많은 책을 냈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시중에 유통 중인 스님의 책 20여 종 가운데 상당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왔다. 여기에는 탁월한 기획자이자 편집자인 시인 류시화씨가 끼어 있다. 류씨는 IMF 직후인 1998년 법정 스님의 법문과 말씀을 모은 책 <산에는 꽃이 피네>를 낼 때 스님 책의 편집자로 참여한 이후 10여 년 동안 스님의 책에 깊이 관여하고 공동 저자로 인세를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스님 자신은 마지막까지 류씨를 믿고 고마워했지만 스님 주변에서는 류씨의 ‘월권’과 인세 수령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맑고 향기롭게’ 이사인 김형균 동쪽나라 출판사 대표는 “각자 입장에 따라 절판 결정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스님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스님이 자신의 책을 모두 없애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무소유의 또 다른 사례를 몸소 보여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출판사에게 출판권이 있는 만큼 협의와 상관없이 책을 낼 수 있으나 스님의 책을 낸 곳이라면 모두 협의를 따를 것으로 믿는다”면서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때 법정 스님의 책들이 다시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출판계에서는 <무소유>나 <아름다운 마무리> 등 소수의 책을 제외하고는 종당 5만권의 인지를 다 소진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1976년에 출간된 <무소유>는 그동안 130쇄 330만권이 판매됐다. 김영석 범우사 편집장은 “이달 8일부터 ‘맑고 향기롭게’ 측과의 협의에 따라 <무소유>를 다시 출고하기 시작한 이후 하루 5000권의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면서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열흘 정도면 인지 상한선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님 입적 이전까지 1년 4개월 동안 31만부가 팔렸으나 입적 이후 한 달만에 25만부가 추가로 팔려 나갔다. 고세규 문학의숲 사장은 “일단 협의에 따라 절판하겠지만 절판이 진정한 스님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해 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길상사 법문집 <일기일회>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유고집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도 최근작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9만~18만부씩 팔렸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