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과 나 - 소설가 정찬주
불일암에서 법정 큰스님을 처음 뵀다.
그때 나는 샘터사에서 근무했는데, 스님 책을 편집하면서 불일암을 자주 찾았던 것이다. 회사일로 가는 출장길이었지만, 나는 1박 2일 출가하는 기분으로 서울을 떠나곤 했다. 나중에는 아예 아내와 두 딸아이를 데리고 불일암을 찾곤 했다.
스님이 그리울 때마다 몇 가지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한번은 스님께서 국수를 끓이시고 내가 설거지 당번을 했을 때다.
스님께서 삶은 국수를 불일암 우물가로 가져가 찬물에 식히는 순간, 꼬들꼬들해진 국수 몇 가닥이 우물 밖으로 넘쳐흐르는 물에 떨어졌다.
스님께서는 망설이지 않고 ‘신도가 수행 잘하라고 보내준 정재(淨財)인데.’라며 주워 드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 한 번은 관광객이 불일암까지 허둥지둥 올라와 스님을 찾았다.
스님과 마주치자 그 관광객이 “텔레비전에서 본 모습과 똑 같습니다. 스님,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묻자, 스님께서 “고향이요? 화두가 따로 없네. 허허허.” 하시며 너털웃음을 웃으시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불일암과 광원암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산자락에 자라는 억새를 보시더니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저 마른 어미억새를 좀 봐요. 푸른 새끼억새가 다 자랄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다가 쓰러져요. 푸른 억새들 사이에서 누렇게 마른 것들이 어미억새지요.”
마침내 나는 몇 년 뒤 회사일과 상관없이 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불일암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잤다.
호반새가 공중제비를 하는 단오날 아침이었다.
나는 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스님께서는 저잣거리에서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과 함께 계첩을 주시고, 오계를 받는 공덕이 무엇인지 법문을 해주셨다.
오계는 ‘나를 비춰보는 거울이자 내 행동을 바로잡아줄 신호등과 같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해 여름 스님께서는 분홍빛 한지에 휘호를 써 보내주셨다.
내용은 지금까지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부처님 말씀인데, 스님께서는 세 구절 속에 팔만대장경의 깊은 뜻이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당당하게, 걸림 없이, 청정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임제선사의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서 있는 곳마다 진리의 자리가 되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