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김연수기자
장익(요한·77) 주교가 천주교 밖에서도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알려지다시피 그는 제헌국회의원, 유엔한국대표단장, 초대 주미 한국대사를 지낸 뒤 국무총리와 부통령을 역임한 장면(1899~1966) 박사의 아들이다. 5·16군사정변으로 단명에 그치긴 했지만 그의 부친은 내각책임제였던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이었다.
장 주교는 또한 건축·조각 등을 비롯한 문화예술에 각별한 관심과 높은 식견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은 오랜 교유도 눈길을 끈다. 이 밖에 그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을 준비하며 교황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북한 동포돕기에 앞장선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 부친인 장면 박사가 고 김수환(스테파노)추기경을 가르치고, 그 자신이 김 추기경을 수십년 보필하면서 맺어 온 특별한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마침 김 추기경 추모 1주기를 앞두고, 장 주교가 후임 김운회 주교에게 춘천교구장 겸 함흥교구장 서리직을 넘기고 사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지난 8일 비 내리는 경춘고속도로를 달려간 강원 춘천시 효자동 춘천교구청. 빗길에 늦어져 시간에 쫓기며 찾은 주교 집무실은 자그마했다. 문패도 없었다. 먼저 인터뷰를 진행 중이던 가톨릭 및 강원 지역 언론사 기자 10여명 만으로 집무실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이들의 인터뷰는 장 주교가 춘천교구장 겸 함흥교구장 서리를 지내며 있었던 일과 강원도와의 인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오는 3월 이임을 앞둔 교구장의 고별 인터뷰에서, 장 주교는 천주교 신자와 강원 도민들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설명하며 “도움과 사랑에 보답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대로 받아 적으면 훌륭한 문장이 될 정도로 정연했다.
얼마 뒤 단독 인터뷰로 바뀌자 집안 이야기로 잠시 화제를 돌렸다. 장 주교의 부친인 장면 박사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이었다. 용산신학교 교사이던 10대 후반에 신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를 가르쳤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평안도 지역에서의 전교 활동에 이어 동성학교 교장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성학교를 나온 김 추기경이 그의 애제자였다.
―부모님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하셨지요. 두 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저희에게도 몸으로, 행동으로 그걸 가르치셨지요.”
―어릴 때 집안 분위기는 어땠는지요.
“화락했습니다. 자유롭기도 했고요. 제 갈 길은 스스로 알아서 간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게 지게 했지요.”
자유로운 가풍 때문인가, 장 주교 형제들의 진로는 다양하다. 5남2녀(어릴 때 사망한 형제가 모두 생존해 있다면 6남3녀)의 형제자매 중 맏형인 진(전 서강대 부총장)씨를 비롯한 3형제가 전공이 다른 대학교수이고, 바로 위 형인 건씨는 건축가다. 장 주교가 사제의 길을 걷고 누님 의숙씨가 수녀가 된 것은 독실한 천주교 신앙 분위기 때문.
경기고를 나온 장 주교는 미국 메리놀대, 벨기에 루뱅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를 거친 뒤 1963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시 국립 대만대와 로마 그레고리안대에서 공부한다. 5개국을 전전한 그의 유학 여정을 이야기할 때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김 추기경조차 인정했던 그의 특출한 외국어 실력이다. 그는 자신이 유학했던 나라의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중국어를 비롯해 신학을 하며 필요했던 라틴어, 희랍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그가 자랄 때 익힌 일본어와 모국어인 한국어까지 포함하면 그가 할 수 있는 언어는 10개나 된다.
―그 많은 언어를 어떻게 익히셨는지요.
“허허…, 어느 정도 하느냐가 문제지요. 제대로 한 게 없습니다. 살기 위해 영어나 불어, 독일어 등 유학한 나라의 말들을 어쩔 수 없이 한 정도지요.”
―1980년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시기 전에 그분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셨는데.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 바쁜 일정에, 40여 차례 한국어를 배우며 단 5분도 기다리게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비교적 짤막짤막하던 대답이 교황의 방한 이야기에 이르자 길어졌다.
“교황님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습니다. 한국에서 예정됐던 22차례의 연설을 모두 한국어로 하겠다고 하실 정도였지요. 그러나 한 번에 길어야 1시간40분, 짧으면 40분밖에 못하는 한국어 강습으로 연설을 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물러선 것이 미사만이라도 한국어로 집전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교황은 이를 위해 로마에서 17차례나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하며 우리 말을 연습했습니다. 결국 방한했을 때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했지요.”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교회사에서 가장 긴 거리를 여행하며 가장 많은 나라를 방문한 교황이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그 나라 말로 미사를 드렸을까. 장 주교는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 방문을 준비하며 연설과 미사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느냐가 논란이 됐지요. 처음 논의된 것은 이탈리아어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가 ‘1000명 중 한 명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는데 당신께서 “미군이 주둔 중인 상황에서 그건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당신의 조국 폴란드가 독일 치하에 있으면서 독일어를 강요받아야 했던 아픔을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폴란드와 한국이 겪었던 비슷한 아픔 탓도 있겠지만, 그분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연설문만 해도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 산더미 같은 자료를 공부하신 뒤 직접 타자를 치며 초안을 만드셨지요.”
장 주교가 당시 애쓴 것은 교황의 한국어 교사로서 뿐이 아니었다. 김 추기경이 직접 구술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방송·평화신문 펴냄)는 장 주교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교황 방한과 시성식이 최종 결정되기까지 많은 사람이 애썼다. 특히 장익 신부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마침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 신부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내 명의의 긴급서한과 공문을 수시로 작성해서 바티칸에 보냈다. 그때 장 신부를 하도 요긴하게 부려 먹어서 ‘장 신부가 지금 로마에서 공부하는 건 하느님 섭리야’라고 위로한 적이 있다.”
- 김 추기경님을 두 번이나 모셨지요.
“서울대교구장 비서를 하던 중 김 추기경님이 부임해 오셨고 이듬해 추기경이 되셨지요. 그 뒤 1976년에도 비서(비서실장)를 지냈지만, 성당 주임신부나 연구소, 대학에서 일할 때나 춘천교구장이 되고 난 뒤에도 자주 뵈며 모셨습니다.”
장 주교가 김 추기경과 직접 인연을 맺은 것은 사제였던 김 추기경이 독일 뮌스터대로 유학 중이던 1950년대 말. 당시 유럽에서 공부 중이던 사제와 신학생 관계로 만났던 이들은 1968년 김 추기경이 서울대주교로 임명된 뒤 비서와 교구장으로 다시 만나 이듬해 일본에서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들을 때도 동행 중이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당시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듣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장 신부에게 “허허, 허허, 장 신부, 내가 추기경이 됐대”라고 겨우 몇 마디 했다고 전한다.
- 먼 곳에서 보면 아름다운 이도 가까이서 보면 달라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 꾸밈없고, 소박한 인간다움이 친근하게 와 닿은 분이었습니다. 가까이할 수록 매력적이고 존경스러운 분이었지요.”
- 어느 인터뷰에서는 한번 혼이 났다고 돼 있던데….
“하하, 그런 인터뷰가 있었습니까? ”
- 무슨 일 때문에 그랬습니까.
“옹색한 마음을 먹고 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 선종 1주기를 맞으며 다시 추모 열기가 일고 있습니다.
“지난해 그분이 선종하셨을 때 추운 날씨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십만명의 인파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그분은 간혹 여론이 말하듯이 정치가도 아니요, 사회 운동가도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진실한 인간이요, 착한 목자였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비천하게 여기고 내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김 추기경 이야기가 이어지자 그는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내놓았다.
“그분을 추모한 인파 대부분은 추기경님을 직접 뵙지 못한 분들이었고 천주교 신자도 아닌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추기경님을 가깝게 느끼고 생각한 건 드문 일입니다. 사회의 음지에서 생활고에 허덕이는 사람,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 불의에 희생된 사람, 아무리 일해도 억눌려 사는 노동자와 농어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이들이 그분에게 먼저 진정으로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장 주교는 김 추기경이 무엇보다 순진하고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회고한다. 더없이 명철하면서도 사람을 단죄할 줄 모르고, 은근한 유머와 미소로 사람을 늘 따뜻하게 맞아주는 온후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런저런 행태가 하도 한심해 격분하며 투덜거렸지요. 그랬더니 저를 보고 미소 지으며 ‘자네도 이 나라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와 고통의 공동 책임은 저버린 채 자신만 도도하고 당당하게 아버지, 스승,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누구보다도 겸허하게 자신의 허물을 통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김 추기경이 모든 일에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단죄하지 않았지만 잘못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맞섰다는 것이다.
- 그분이 그렇게 약자를 사랑하면서도 어려움에 맞설 수 있게 한 근본적인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더 없이 비우고 낮추신 주님 자비의 복음 덕이지요. 추기경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따랐습니다.”
- 복음이 그토록 위대한 힘을 지녔다면 천주교가, 천주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남보다 나은 사람들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교리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한없는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계속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사생활에서 공적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복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엄청나게 늘었는데 우리 사회는 왜 이리 각박해지는가.
- 실제 교회의 현실과 이상은 괴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그렇다고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요. 내실과 속살을 갖추고 우리 스스로가 정말 알차고 진실하게 사는 공동체가 돼, 나와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돼야 하는데,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남북문제 등의 여러 난맥상에 교회의 책임도 없지 않습니다.”
- 그럼,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시급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젠 제발 나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옳다고 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고, 겸허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면 됩니다.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말하는 것보다 들을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 주교는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라는 증거는 많다”고 말했다. 그 중 중요한 것으로 그는 문학이나 건축, 미술, 음악 등을 하는 이들이 나이가 든 뒤에 교회로 들어오는 일을 꼽았다.
“창작 생활을 하는 분들은 대중을 생각 없이 따라가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뒤에, 소리없이 신앙을 찾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 아니면 불가능한 궁극적인 지향에 동참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궁극적인 것이라. 그렇다면 그는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이웃 종교와 종교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 법정 스님과의 교유는 널리 소문이 나 있습니다만.
“30년 가까이 친하게 알고 지냈지요. 종교는 다르지만 스님이 만드신 ‘맑고 향기롭게’라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그분을 모시고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천주교 성지를 순례하기도 했지요. 스님도 천주교에 대해 많이 아십니다. 성경뿐 아니라 각종 천주교 책을 많이 읽으셨지요. 특히 중세 독일의 영성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좋아하셨습니다.”
- 어느 신부가 불교와 천주교의 공통점은 ‘독신’뿐이라고 하던데.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수행·수도를 강조하는 점도 닮았지요. 기도와 전례(예불) 등의 의식을 중시하는 점도 같고 천주교엔 수도자 공동체, 불교에는 승가(僧家) 공동체가 있습니다. 독신과 무소유·가난의 길을 걸으며 초탈을 지향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은 더욱 근원적인 공통점입니다. 내세를 생각하되 ‘지금 여기’서의 참다운 삶을 강조하는 것도 같습니다. 요컨대 불교나 천주교는 특정한 형태의 역사 안에서 나타난 종교의 길, 또는 방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무소유, 가난을 이야기하시는군요.
“가난은 통장에 저금이나 돈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소유에 대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삼가고, 비울 줄 알며 집착이 없는 것이 진정한 가난이지요.”
- 종교 지도자로, 일반인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방식을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망설이다) 어느 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그냥, 살라!’”
그냥, 살라…. 생존이 화두인 글로벌 경쟁시대, 발버둥쳐도 불안하기만 한데 탐욕도 집착도 내려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그냥, 살라!’니 이게 가능한가.
-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뛰어야 하는데….
“생명이라는 게 모두 나름의 이치가 있고 때가 있습니다. 벼 이삭을 잡아당긴다고 쌀이 되지 않습니다. 흔히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화하니까 인간조차 통째로 바뀐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입니다. 헐떡거리며 뛰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걸어가야지요. 변화에 휩쓸리기보다 내면의 중심을 굳건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분방한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인터뷰=김종락 문화부 부장대우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