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香遠益淸)
황인용 (수필가ㆍ한글+漢字문화 지도위원)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라는 미당(未堂)의 시는 애오라지 큰 스님의 열반에 미리서 바치고 간 회심의 조사(弔詞)가 아니었을까?
큰스님께서 '맑고 향기로운' 한 줄기 바람으로 입적하신 후 한달 동안은 아침 일찍 가장 고요한 마음일 때 '산에는 꽃이 피네'를 아껴가며 몇 장씩 읽었다. 마음의 오솔길을 산책하듯, 그 오솔길 옆에 솟아나는 옹달샘물을 천천히 음미하듯 그렇게 읽은 것이었다. 아니 큰 스님과 함께 그 길을 거닐면서 산새 울음소리처럼, 시냇물 소리처럼 명징한 설법을 경청하는 기분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게다.
실로 큰 스님과 동 시대를 더불어 호흡하며 통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막중한 행복을 하늘로부터 허락받은 것인가? 큰 스님께서 곁에 계셨다는 사실 자체가 무량의 위안이요, 무상의 다행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큰 스님의 말씀은 맑고 향기로운 연꽃의 언어 아님이 없지만 몇 구절만 추억을 위해 반추해보기로 하자.
"안에서 향기처럼, 꽃 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조그만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걸 누릴 때 그것이 행복이다."
"무심히 피어나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뜻을 통해 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한 송이 야생화도 그처럼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거늘 하물며 불교의 상징꽃이자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표상인 연꽃에서랴!
서울 근교에서 가장 유명한 연못은 양수리에 있다. 여름철 연꽃 사진은 물론이고 겨울철 꺾어진 줄기가 무수한 기하학적인 도형을 투영해내는 광경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이 줄을 잇는 곳이다. 애석하게도 서울에서는 공해 때문에 연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이 작명의 출전인 향원정(香遠亭)이나 애련지(愛蓮池)에도 연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늘날이 유명무실(有名無實)의 시대라는 대표적인 본보기랄까?
때문에 지난 7월6일 우리 아파트 중앙 호수 공원에 피어오른 연꽃을 대하는 감격은 무량 그 자체였다. 천만명 서울 인구 가운데서 천분의 일 정도만 누리는 행운이니 어찌 그렇지 않을 도리 있었으랴! 참고로 적자면 호수의 물은 한강 깊은 곳에서 끌어온 일급수라는 사실이다. 좌우지간 연꽃은 청순하고 고고한 자태가 지상에 하강한 선녀의 모습이랄까? 덕분에 호수의 분위기도 일거에 청신해졌다. 지고지선의 꽃은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킴을 비로소 깨닫겠다. 아침 저녁으로 잠심하는 청복은 어찌 이 또한 막중한 시절 인연이 아니랴?
풍경에 감탄하는 일은 신성에 참여하는 고귀한 행위라고 말했던 시인이 떠오른다. 큰 스님 또한 순수하게 몰입할 때 영성과 불성이 드러난다고 설법하셨던 거다. 큰 스님의 평생은 그러한 신성에의 부단한 참여가 일상화된 삶이었다. 연꽃 또한 끝없는 자기 고양과 자기 정화의 노력 결과 향원익청의 꽃을 피워내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싶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존재함도 연꽃이야말로 화엄(華嚴)의 꽃이라는 뜻일 시 분명하리라.
어쨌든 진흙탕 같은 서울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를 대할 수 있음은 무상의 기쁨이다.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전할 수 없음이 못내 안타까울 뿐.... 이 풍진 세상에서도 고귀한 연꽃이 피어남은 이른바 불행 중 다행이다. 환언하면 전화위복의 상징이다. 구원(久遠)과 구원(求遠)의 상징체계로 삼아 자신의 정화를 뛰어넘어 세상을 정화하려는 비원을 세워 마땅하리라.
실제로 참다운 의미에서의 행복은 전화위복인 경우가 태반이다. 도가(道家)의 역설에 따른다면 행복하지 않은 행복이 최고의 행복 아니던가? 불교의 가르침 또한 참으로 행복하려면 행복을 버리라는 종지(宗旨)가 아니던가 말이다. 큰 스님께서는 행복도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에서 가능하다고 설법하셨다.도교라고 그 방향에서 무엇이 다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