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곡(思師曲)
덕현스님 (길상사 주지)
투명한 봄햇살이 누리에 가득하다. 새벽달은 그냥 예처럼 밝았다.
몸살이 나서야 조금 생긴 여유. 그러나 도량 거니는 발걸음 헛헛해라.
담벼락의 투박함 뒤에 숨어 있다 꽃봄의 문을 여는 영춘화(迎春花)의 놀라운 웃음. 문득 눈이 뜨인다. 아, 스님도 그랬었구나. 서슬이 죽지 않은 크리스탈처럼, 끌리지만 만질 수 없는 사람이었으되, 문득 가슴 따뜻한 사람을 만나면 온 영혼을 열어 함께 피던 꽃이었구나.
모퉁이 돌아서면, 스님처럼 사람 없는 곳에서 더 빛나는 이 매화의 고졸함이 있다. 스님은 섬진강가 마을 먹점골 매화가 제일 좋다고 그 청매 꽃그늘에서 차를 드시기도 하셨었지.
담장 밑 조금 낮은 곳에는 5월의 영광을 미리 준비하는 모란의 불그레한 새 순들이 또 눈에 띈다. 가을 녘에 남쪽 암자에 내려와 손수 전지가위를 들고 잎 지고 난 모란 가지들을 다듬으시곤 했던 스님. 난 스님의 말씀을 따라 추위 타는 겨울 모란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큰절에서 톱밥을 얻어다가 이불처럼 밑동 주위에 둘러 덮어주었었다.
그렇지만 이제, 꽃이 다 뭐란 말인가. 봄날에 가시겠다던 약속을 끝내 당신은 지키셨지만, 그리움만으로 남겨진 자들에게는 이토록 밀물지듯 엄습해오는 봄이란 그저 가슴 아리게 여울져오는 처연함일 뿐.
이 세상의 눈부신 것들을 당신이 앓으셨듯이, 그렇지만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이 덧없는 세상의 꽃들을, 더불어 이 쓰라리고 노여운 담벼락이나 썩은 것들을 다 껴안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때는 다 없었던 것처럼 참고, 어떤 때는 햇살 같은 다사로움으로 기다려 녹이고, 어떤 때는 달빛의 검광(劍光)으로 물밑을 뚫어야 하는가?
자신이 없다.
일제치하, 한국동란, 군부독재, 급격한 산업화......, 모든 것이 굴절되는 어둠의 시대를 스님은 한 생애를 던져 투과하며 화살처럼 곧게 날아가셨고, 색깔 없는 수행자의 옷을 입고 가장 깊은 은자처럼 살면서도 세상을 그토록 내밀하게 열애하셨으니, 가장 높고 어려운 것을 가장 단순하고 쉽게 말하고, 말보다 행으로, 행보다 존재로 먼저 드러내 보이셨으니, 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외로움의 지존과 청정함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셨으니, 도대체 누가 또 그렇게 한단 말인가? 그것이 비록 부처님이 정하신 가장 멋진 주인공의 배역이라 해도 이제 누가 있어 그 험한 역을 맡으랴.
길상사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온다. 그들의 가슴은 슬픔과 기쁨의 터치에 더 예민하게 떨도록 조율된 악기의 현처럼 마치 누군가의 연주를 다시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막상 그 연주자의 자리는 비어있다. 아무도 감히 앉으려 하지 않는다.
‘맑고 향기롭게’는 이제 그 언표(言表)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 한 가운데 떨어져 세상 가장 가 쪽까지 퍼져가는 동심원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처음 수면 위에 떨어진 그 돌멩이는 이미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악기의 조율은 얼마나 쉽게 어그러지고, 수면 위엔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부는가. 꽃은 얼마나 빨리 지고 마는가.
낮은 길어졌지만, 하루는 더 빨리 저문다. 저녁 북소리도 공허하다.
몸살감기 덜 떨어진 목소리로 예불 마치고 법당을 나선다.
아, 그런데...... 별이다. 어둠 속에서 승천한 꽃들이다. ......어쩌면 저 산 능선 위로 막 돋은 별이 스님 별이다. 눈빛이 닮았으니.
스님은 병원에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잠겨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먼 땅에서 눈에 막혀 아직 오지 못하고 있는 어느 영혼을 부르며 말했었다.
“사랑해.”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그 표현은 스님 입에서 나온 최초의 것이라고 누가 말했다. 나는 스님이 들고 있는 수화기의 저쪽에서 전해오는 그 영혼의 떨림을 감지했다.
어느 해 여름, 찾아온 몇 사람에게 스님은 좌선을 가르쳐 주셨었다. 그 설명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었다. 그러나 스님은 낮엔 사람들에게 꽃을 보여주셨고 밤엔 평상을 마당 한 편에 꺼내놓고 별을 보게 하셨다. 그 중엔 그 영혼이 끼어 있었다.
까맣고 높고 광막한 어둠에, 빛나는 빗금을 긋는 유성을 보고 탄성을 지르던 그 영혼이 물었었다.
“스님, 우주의 끝이 어디예요?”
“우주에 어디 끝이 있겠어? 저 무한한 우주에......”
그 대답도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문학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영혼들에게 별을 보여주셨고 영혼들은 오래 그 많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은 열리어, 자신들이 어둠 속에서 잠든 꽃송이임을,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지고 나면 곧 하늘의 별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것을 아마 깨달았을 것이다.
그 여름이 저물어 가을이 되고, 가을 암자를 지키며 흩날리는 낙엽을 치우다 지쳐가는 햇중에게 스님은 편지를 보내며 그 끝에 이렇게 쓰셨었다.
“낙엽 치다꺼리에 고생이 많겠다. 잎 지고 빈 가지 끝에서 새 봄의 싹을 찾아보아라.”
봄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스님에게 난 한 가지 봄꽃을 꺾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잎 돋지 않은 나무 가지 사이로 흔들리는 별들, 그 속에서 스님의 사라진 기침소리와 호흡을 본다.
별이 내려 꽃이 되고 떨어진 꽃들은 하늘에 올라 별이 된다. 우리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꽃과 별을 보는 그 눈빛이 되는 일이다. 때론, 꽃이 되고 별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보여지는 나’가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