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을 떠나보내는 마음
버리고 또 버리며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이 시대의 거목 법정스님께서 홀연히 떠나시던 날(2010. 3. 11 오후 1시 51분, 길상사에서 입적) 내 가슴 속에는 가눌 수 없는 아픔이 해일처럼 일었다. 하루 종일 스님 생각에 머리가 여유롭지 못했다.
다비를 위해 12일 순천 송광사로 모셔지고 난 뒤, 13일 새벽에야 시간을 내어 길상사를 찾았다. 물소리 바람소리 자연의 숨소리는 소소(昭昭)한데 새벽어둠은 보채고 뒤척이며 스님을 찾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무소유',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고 쓰인 흰 천이 이 곳이 상가임을 알리고 있었다. '삼각산 길상사' 현판 아래 허탈한 발걸음을 멈추고 합장을 하는데 벌써 가슴은 뛰고 눈가엔 이슬이 맺힌다.
'이 곳에 이르는 이는 묵언으로 스님을 뵈옵고 헌향과 삼배만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스님의 뜻에 따라 꽃과 조의금은 받지 않습니다.'
라는 글귀가 평소 스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하고 있었다.
설법전(說法殿)에 마련된 분향소에 삼배를 올리니 왜 이렇게 서럽게 눈물이 흐르는지 울고 또 울고 하염없이 흐느껴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다는 생각에 서럽고 분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울고 또 울었다.
법정스님은 내 삶의 룰 모델이었다. 무소유의 가르침도 가르침이려니와 14년 전(1996년), '사랑의 일기' 지도교사로 인연을 맺은 이후 스님이 지은 많은 책들을 섭렵하면서 나도 언젠가는 스님처럼 잔잔하면서도 자연을 닮은 글을 써야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 분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다시는 그 분의 글을 접할 수 없다는 생각도 더 아픈 슬픔으로 다가왔다.
우리네 삶에서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닦달하는 고된 인내와 삶을 채찍질하는 수행정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요리하여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심연의 자기관리,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뭇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냉철한 절제 등 범인으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 무소유인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스님은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으로는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물질적 차원을 넘어 정신적 차원까지도 비워내야 다다를 수 있는 성자의 경지라 감히 말하고 싶다. 스님은 이렇게 어려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며 '무소유'를 실천하신 분이다.
어제와 다름없이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스님이 마지막 묵었던 행지실(行持室) 옆으로는 실개천 물소리가 여전한데 사립문은 잠긴 채 주인 잃은 허탈감에 나지막한 기와집은 텅 비었다. 그토록 크신 스님이 떠난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전하리만치 행지실은 소박하고 적막하였다.
"어떤 비본질적인 행위로도 죽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시던 스님의 뜻대로 스님 가신 흔적은 말끔히 치워졌는데 스님이 좋아하셨던 담장 밖 느티나무 위의 새 집과 단풍나무 두 그루, 이제 곧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목련나무가 스님 앉아 계시던 툇마루를 넘보며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다.
행지실을 둘러보고 돌아서는 길에서 먹먹했던 가슴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스님의 영정 앞에 눈물을 쏟고 스님의 자리에서 울리는 침묵의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스님을 떠나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극락전(極樂殿) 앞마당에 내려오니 까치소리 허공을 적시고 산비둘기 한 쌍이 자유로이 노니는데 이게 바로 스님이 갈구하던 본래의 참모습이 아닌가 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비의식은 저녁 뉴스를 통하여 보았다. 스님의 뜻대로 만장 하나 없이 가사 한 장에 의지한 채 조촐하게 치루어진 다비의식에서 스님의 무소유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볼 수 있었다.
화중생연(火中生蓮), 스님의 거룩한 뜻이 불꽃 가운데 연꽃으로 피어나 우리 중생들의 혜안을 밝히고 무명에서 깨어나는 등불이 되길 기도해본다. 그리고 스님의 극락왕생을 빈다.
2010. 3. 13
송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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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 주지스님 앞으로 뒤늦게 온 편지를 워드입력하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