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그는 ‘개혁가’였다
세상과 불교 바꾸려 ‘현실참여’
인혁당 사건 ‘충격’ 불일암으로
한겨레
2002년 7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북한산 사패봉 어귀에서 북한산 관통 터널을 저지하려 천막농성을 한 수경 스님을 찾아 격려하던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은 대중들에게 당대 최고의 수필가로 잘 알려져 있을 뿐, 그의 개혁가적 면모는 사실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불교가 내부 문제에만 침잠해 있을 때 그는 세상과 불교를 바꾸려고 애쓰던 선구자였다.
법정 스님은 1973년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논설위원과 주필을 지낼 당시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고, 당시 민주화운동의 횃불 노릇을 했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젊은이가 생목숨을 잃은 데 대한 충격으로 서울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1975년 10월 홀연히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으로 들어가 독살이를 시작했다. 그가 송광사로 내려가자 사복형사 너덧 명이 사찰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그를 감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불일암으로 간 이후에도 남모르게 저항정신을 갖고 글을 쓴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법정 스님의 속가 조카뻘인 현장(보성 대원사 주지) 스님은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 들어간 뒤에도 경복궁 옆 법련사(송광사 서울 분원)에 방 하나를 두고, 매월 법문을 하러 올라올 때마다 기거했는데, 어느 날 스님이 없던 그 방에 들어가서 스님이 지은 시들을 스크랩해둔 책자를 보았다”며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들에는 독재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 스님은 “그 스크랩들을 스님 몰래 복사해 두려다 실패한 적이 있는데,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류도 산 적이 있는 스님이 그런 글들이 외부에 유출될 위험을 경계한 때문인지, 어느 날 아궁이에서 직접 그 스크랩을 모두 태웠다”고 덧붙였다. 현장 스님은 법정 스님이 자신에 대한 감시를 피해 <불교신문> 등에 ‘형운’이란 가명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개혁을 담은 글들을 쓴 사실도 공개했다.
현장 스님은 또 세상뿐 아니라 불교계 개혁을 열망한 법정 스님의 초기 글인 ‘부처님 전 상서’를 소개했다. 법정 스님이 세상에 내놓은 최초의 글인 ‘부처님 전 상서’는 그가 32살 때인 1964년 9월 <불교신문>에 기고한 3편의 글이다.
이종승 작가 제공.
민주화 열망 글 ‘가명기고’도
글 ‘부처님…’ 불교 독선 질타
‘심산에 수목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무심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묵묵히 지내려 했는데, 이 울적한 심정을 당신에게라도 목소리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 낼 수 없다’로 시작하는 ‘부처님 전 상서’에는 불교계 개혁가다운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조계종 교육의 문제를 지적한 1편 ‘교육의 장’이란 글에선 ‘강원이나 선방이 눈밝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실로 교육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전근대적인 유물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을 만큼 타당한 방법론과 구체적인 계획성이 부재함’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법정 스님은 “참선자가 선에 참하기보다는 선에 착(집착)하기 일쑤고,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서 오히려 자락을 삼는 것은 모두 이런 결함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선가의 실상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이어 “기본재산이 좀 여유있거나 수목이 우거진 절은 서로가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꼴을 많이 본다”며 감투싸움과 사찰 뺏기 싸움에 대한 분노도 나타냈다.
또 법정 스님은 “오늘날 한국불교가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현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없는 종교라면 그것은 하등의 존재가치도 없다”며 현실을 나 몰라라 하는 불교계 안팎의 무관심을 ‘죄악’이라고 꼬집었다.
글은 “과감한 일대 개혁이 없이는 당신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는 영영 질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며 “좀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에서였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끝을 맺고 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