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에 대한 반론
인터넷뉴스부 , 2010-03-30 오후 3:56:03
김수환 추기경과 더불어 이 시대 지성과 양심의 표상이었던 법정 스님이 입적한 후, 그가 남긴 수필집 '무소유'가 화두로 등장하며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 법정 스님은 유언을 통해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며 자신의 저서에 대한 절판을 부탁했다. 출판사들은 찍어내기가 무섭게 팔리는 보증된 베스트셀러임에도 유언을 따라 흥행카드를 접기로 합의했다.
어느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한 네티즌이 '무소유'를 올려놓았는데 낙찰가가 무려 21억1천만 원까지 치솟았다. 물론 구입 의향이 없는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이를 통해 '무소유' 신드롬이 삼투압처럼 번져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소유'를 '소유'하자는 독서 열풍이 봄의 문턱에서 일고 있으니 아무튼 반가운 현상이다. 다만 이 책이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이기심으로 가득 찬 현대인의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길 바란다. 실제로 이 책은 초판본의 경우 30~50만 원 선에, 헌 책방에서는 5만 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외국에서도 로빈슨 크루소우 초판본 등은 수천달러를 호가한다.
무소유(simatiga)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을 뜻한다. 가진 것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원래 불교 용어이나 일반 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는 1976년 범우사에서 초간본을 낸 이래 올 3월까지 무려 3판 86쇄를 찍은 밀리언셀러다. 먹빛 장삼 한 벌이 전 재산인 스님은 난초를 무척 사랑했다. 난초에 정(情)을 듬뿍 쏟은 스님은 외출 시, 난초가 걱정되어 발길을 되돌리기 일쑤였다. 이것마저도 물욕과 집착이라고 깨달은 스님은 방문한 지인에게 그 난초를 주었다. 그러고 나서 훨씬 자유스러웠다고 스님은 저서 '무소유'에서 고백하고 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불가의 말이 있듯 이 세상에 자기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소유권을 가진 것은 사람이 이승에 살아있을 동안 잘 관리하라는 '한시적 신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재화와 부귀영화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모든 재화는 뜬 구름과 같다. 가진 것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만족도를 조사해봤더니 그 이전 보다 불행해졌다는 대답이 더 많았다. 재화를 올바로 쓰지 않고 본능적 욕구를 채우는데 마구 썼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질병 중 하나로 '성공 우울증'이라는 게 있다. 사업에 성공을 한 후 겪는 우울증이다. 성공을 했으면 기쁘고 즐거워야 할 텐데 반대로 우울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어렵게 일구 놓은 내 것을 남에게 뺏기지 않을까, 나의 행복이 사라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불안증을 겪는다는 것이다.
초대 민선 청주시장을 지낸 고 청곡 홍원길 씨는 생전에 대문을 달지 않고 살았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는 청빈낙도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목민관이었다. 부(富)는 행복의 원천이지만 때에 따라선 번민의 근원이다. 법정 스님은 글과 행동으로 무소유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쳤다. 모든 중생들이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사회의 갈등과 범죄 등 부정적인 요소들이 없어지면서 세상이 극락으로 돌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과 가르침은 수행을 거듭한 성자(聖子)의 몫이지 갑남을녀(甲男乙女)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무조건 흉내 낼 사항은 못 된다. 뭇 사람이 '무소유'를 실천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경제는 당장 거덜 나고 만다. 재화는 일을 하게 하는 동력인데 중생들이 '무소유'를 외치면서 너나없이 탁발로 연명한다면 직장은 의미가 없어지고 수많은 음식점은 폐업의 길로 접어들며 소비처를 잃은 공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실업자가 넘쳐날 것이다.
또한 각종 사회 범죄가 없어진다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나 경찰이나 교정직 공무원들에 대한 대량 해고가 불가피해 질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그런 문제들은 여지없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무소유는 하나의 이상이지 현실이 될 수는 없다. 당장 돈이 없으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배가 고파도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으며 추워도 옷을 사 입을 수 없다. 우리는 과욕만 경계해도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절반 쯤 실천했다고 봐야 한다. 항상 버는 만치 쓰고 자기의 형편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면 욕심으로 인한 불행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고, 작은 상처에도 아파하며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다. 그 누구도 삶의 고통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러기에 보살은 깨달음의 일보직전서 각자(覺者)를 거부하고 삶에 지친 중생을 보듬고 있다. 불가에서 쓰는 말 중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의 강을 건너 서방정토로 간 부처가 이승의 중생들을 보니 너무 불쌍하여 중생을 보살피기 위해 속세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다시 '무소유'의 책장을 넘겨본다. 신록의 향기처럼 청정한 언어가 가슴을 파고든다. 그 깊은 지혜의 강물에 빠져들고 그 높은 경륜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과연 모든 중생이 법정 스님을 쫒아갈 수 있을까" 하며 괜히 어깃장을 부려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