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 법정 스님 유언과 부처님 최후법문
‘무소유’로 이름을 떨친 법정 스님의 유언을 놓고 오가는 말이 많다. 당신이 남긴 책은 모두 거두라는 유지를 그대로 받드는 것으로 최종 의견을 모은 모양이다. 관련 인사들의 깊은 논의 결과일 것이다. 객석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일도 아니다. 다만 평생을 불제자로서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 제도(上求菩提下化衆生)하기를 본분으로 생을 마친 스님의 유언은 세속이 아닌 불교적으로 해석해야 맞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쉽다.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綠野苑)에서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불가의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는데 8만대장경은 다 무엇인가. 말이나 문자 자체에 구속당하지 말라는 경계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에 있지 않다는 가르침이 깃든 화두이다.
나는 스님의 열반 보도를 통해 알게 된 ‘무소유’를 급히 수소문해서 읽었다. 이 수필은 장마 끝에 운허노사를 찾아가다가 난이 햇볕에 시들 것을 걱정하여 되돌아서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그리고 난에 얽매이는 자신의 집착을 들어내고 마지막에 소유의 역리(逆理), 즉 다 버리면 모두 얻는 이치를 말한다. 시들어가는 난에 대한 연민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스님은 집착을 먼저 지적한다. 수필 형식을 빌려 분별과 주착을 경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시(垂示)한 법문으로 나는 읽었다.
스님은 무수한 생령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깨우쳐 주는 제도사(濟度使)이다. 그 일을 자신의 견성보다 앞세운 스님인 것 같다. 30권에 이르는 저서가 그것을 증거 한다. 인기 작가가 되겠다고 그 수고를 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게 그분의 하화중생하는 방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법도 설한 바 없는 그 부처님의 말씀이 온 누리의 중생을 가르치듯 스님의 유언은 혹시 그런 부처님의 최후 부촉을 다시 일깨운 수시 아닐까. 빵은 육체를 키우고 책은 정신을 기른다는 퀴퀴 묵은 경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자구에 매인 세속적 유언 해석이 아쉽다.
박영학 원광대 교수,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