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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27

    무소유는 어디 있는가 -박상우 (동아일보 3.27)

본문

[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


무소유는 어디 있는가


삶, 유상국 그림 제공 포털아트

법정 스님이 입적하자 많은 사람이 서점으로 가 ‘무소유’를 찾습니다. 단 며칠 사이에 재고가 바닥나 품귀 현상을 빚자 온라인에서 터무니없는 웃돈을 붙여 거래하는 일까지 생겨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예견이라도 한 듯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생전에 출간한 모든 책의 절판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살다 간 스님에 대한 존경이 결국 소유의 난장으로 이어지는 걸 보며 ‘무소유’마저 소유하려 집착하는 세태를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소유란 무소유 자체가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심신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신입니다. 정성스럽게 기르던 난초 때문에 출행이 부자유스럽다는 걸 자각한 뒤부터 법정 스님도 가진 것을 해방시키고 무소유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집착이 곧 자유를 스스로 박탈하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가르침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다간 청빈한 사람도 무수히 많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운명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생기고 성서에서도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욥 1:21)’는 가르침을 곳곳에서 되풀이합니다. 이치는 명백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무소유를 실천하고 수행하는 일이 어려우니 사람들에게는 막연한 추상이나 뜬구름처럼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완전한 무소유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생명활동을 할 수 있으니 무소유란 필요한 만큼의 소유, 필요 이상의 것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는 정신입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 많이 가질수록 탐욕과 자만심이 늘어나니 무소유의 자유와는 담을 쌓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유심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것을 왜 가지려 하는가,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합니다.


소유의 출발점은 우리의 오감입니다.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순간부터 인간의 욕망은 작동합니다. 하지만 탐욕을 일으키는 모든 대상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고 그것에 사로잡힌 나는 순간적인 욕망의 주체일 뿐 근본적인 자아와 무관합니다. 그래서 부처는 ‘물질은 거품덩어리 같고, 느낌은 물거품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 같다’는 게송으로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현대 인지과학 분야의 발견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무소유는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입적 직전까지 속계의 세태를 걱정해 ‘무소유’를 절판으로 소멸시키려 한 스님의 견성에는 소유 세상에 대한 염려와 개탄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무소유를 책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인생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마음으로 이루려 노력해야겠습니다. 지나치게 소유했거나 지나치게 소유하기 위해 잃어버린 마음의 자유를 회복하지 못하면 무소유는 뜬구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소유는 읽고 터득하고 깨닫는 게 아니라 실천하고 수행하는 데서 얻어지는 구체적 자유입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