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기리며
실물만 추구하면 위태로워
다양한 가치로 삶의 균형 유지하길
라힘 카말,아만딥 거프릿.지난달 끝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아닌 '햄버거'로 이름을 남긴 두 인도 선수다. 빙속과 스노보드 국가대표였던 두 사람은 쇠고기가 든 햄버거를 먹다 들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두 선수를 적발한 사람은 말릭살릭이라는 코치였고,코치는 그 사실을 고국의 총리에게 보고했다. 국가 중대사였다는 얘기다.
적발하고,현장과 물증을 촬영하고,사진을 국가수반에게 이 메일로 보고한 과정을 세계 언론들은 극적 표현까지 동원해 보도했다. 인도에서 소는 그만큼 신성한 존재이며 상징이다. 두려울 수밖에 없다.
조금 다른 얘기일진 모르지만,어떤 면에서 우리에겐 호랑이가 그런 대상이다. 물론 범국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호랑이를 숭상하거나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통정서와 토속신앙 안에서 호랑이는 분명 두렵고 신성한 상징으로 기능해 온 건 사실이다.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들 가슴에 새긴 문장(紋章),호돌이 호순이가 서울올림픽 공식 마스코트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호랑이가 사회적 금기는 아니다. 훼손한다고 하여 처벌 받는 경우는 없다.
이미 오래 전에 호랑이는 요즘 말로 스타일을 구겼다. "호랑이 온다. 뚝 그쳐라" 했더니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곶감 줄게 그쳐라" 했더니 뚝 그쳤다. 일찌감치 호랑이보다는 곶감이었다. 한국과 인도,곶감과 햄버거.조금 다른 얘기긴 해도 상징과 실물 관계라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점이라면 한국에선 호랑이보다는 곶감이,인도에선 햄버거보다 소가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상징이 우위인 사회와 실물 제품이 우위인 사회.어느 쪽이 더 좋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한쪽으로만 가치가 치우치는 사회가 위태롭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상징을 강조하는 것도 제품을 선호하는 것도 나름의 필요와 이유 때문이겠지만, 뭐든 지나치면 병이 되는 이치를 외면할 수 없다.
게임에 중독되어 영아를 굶어 죽게 한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에게 부성과 모성에 대한 가치,생명이 소중한 근본 원리,존재의 상징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삶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어처구니없는 영아 사망사건만 심각한 게 아니다. 극단적인 예가 그렇다는 것뿐이고 실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실생활 도처에 잠복해 있다. 주택,교육,출산,취업,결혼,장례절차와 상속 문제까지 늘 곶감이 우선되고 호랑이는 뒷전이다.
어떤 것이든 한쪽으로만 쏠리면 쉽게 무너진다. 세상엔 곶감과 호랑이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둘 사이에 넓게 분포하는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든든하게 유지되려면 밑변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무뿌리는 지구의 중력을 향하지만 가지는 그것을 거스른다. 숨 쉬는 것들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만 식물은 산소를 뿜어 자연의 균형을 유지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심으로 모여들 때 숲과 들판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해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너나없이 곶감을 좆을 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의 상징을 살았던 이들도 있다.
'Economy'가 생산 · 분배 · 소비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부(富)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일지는 모르나,적어도 '경제(經濟)'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가로세로 촘촘한 베를 짜듯 세상을 조리 있게 잘 경륜(經綸)하여 사람을 어려움에서 구한다는 뜻이다. 내외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곶감만큼이나 호랑이라는 상징도 균형있게 필요하다. 올해는 호랑이해다. 상징을 다루는 문학가의 소임을 한 번 더 새롭게 다져본다.
구효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