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3월 26일] 무소유는 실천이다
박광희 생활과학부 전문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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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보험사 AIG를 향한 미국인의 분노가 극에 달한 적이 있다. 세계 경제가 바닥을 향해 떨어질 그 당시 AIG는 256조원의 구제금융을 받고도 보너스 잔치를 하다가 국민적 분노에 직면했다. 당시 한 보험사의 부도덕한 보너스 잔치에서 본 것은 집요하고도 뻔뻔한 인간의 욕심이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미국의 사례를 새삼 떠올린 것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며 무소유를 화두로 던졌기 때문이다.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는 무엇일까, 스님 스스로는 무소유를 100% 실천했을까, 가족으로 또 사회구성원으로 이중삼중 규정된 관계 속에서 무소유가 가능하기는 할까, 가난하고 궁지에 몰린 사람 앞에서도 무소유를 입에 올릴 수 있을까.
경제위기를 부른 한 당사자 AIG가 양심 혹은 명예회복을 놓아버린 것은 그만큼 물욕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강조한 것도 바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뜻에서였다. 스님은 소유욕을 특히 경계하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갖고 있으면 거기에서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이 다시 우리를 얽맨다고 말했다. 권력 가진 이가 권력에, 돈 있는 이가 돈에, 학벌 좋은 이가 학벌에 더 매달리는 이유 역시 거기에 집착이 생겼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도가 지나쳐 그들은 그것이 자기 대에서 멈출 게 아니라 영속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전체의 욕심을 모두 합치면 그 사회에서 실현 가능한 욕심 총량을 넘어서게 마련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욕심을 다 채울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욕심을 충족할 수 없으며 심지어 마땅한 자신의 몫을 뺏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 제한을 두어 개인이 욕심을 무한대로 키우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을 짓밟는 행위를 막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권력과 금력은 대체로 그것을 원치 않는다. 도리어 경쟁 등의 이름으로 위장해 약자를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더 큰 소유욕을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권력도, 금력도 없는 혹은 적게 가진 사람들의 태도다. 하지만 이들이 꼭 그것들에 반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량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소유욕을 채우기 위해 부도덕한 것에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재개발 또는 뉴타운 사업에 열광하고 부동산 투기에 슬그머니 동참했으며 개인의 물욕을 한껏 부풀린 사람들을 정치와 행정의 지도자로 뽑아 왔다.
그런데도 법정 스님 사후 무소유 열풍이 몰아쳤으니 이상한 일이다. 어찌 보면 개인적 소유욕을 실현하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경계한 스님의 말씀을 받드는 모순이야말로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일 수 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한 상태에서, 스님의 무소유를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욕심은 내려 놓자. 욕심도 버리려 하면 어느 정도는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욕심을 덜었으면 어렵고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관심을 나눠주자. 스님 역시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발족하면서 마음을 맑게 하고 비우기 위해서는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 욕심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는 거부하자. 그런 사회는 누군가를 희생시키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
말로만 떠드는 무소유는 의미가 없다. 무소유에 공감하는 열기가, 뒤틀린 욕망 구조를 타파하는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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