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행복했습니다
행자시절 음력 설에 불일암에 세배를 갔더니
스님은 “번거로운데 그냥 선채로 세배하자
행자기간은 평생 중노릇 할 농사를 짓는 일이니 즐겁게 복을 지으라”
“딱 한 번 나는, 나의 불운을 원망하여 불평한 적이 있다. 당시 너무나도 가난하여 신발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아린 맨발로 투덜거리며 쿠파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때 거기서 나는 발 없는 사람을 보았다.”
법정스님 가신 지난 며칠간은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아디의 시가 떠올랐다. 어떤 상황, 어느 위치에 처하더라도 아래.위의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과 가슴을 지닌 사람, 그는 이미 현자이다.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법정스님의 삶에서 ‘무소유’라는 자기 초극의 메시지를 교훈 삼을 수 있다.
내가 스님을 처음 뵈었던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파고가 절정을 치닫던 1980년 봄, 광주시민회관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였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 원한을 원한으로 갚아서는 원한이 쉬어지지 않나니, 원한을 버리는 게 그 원한을 갚는 길이요, 영원한 진리이다.” 이런 말씀, 참으로 낯설기만 한데 모든 투쟁과 폭력의 뿌리를 나로부터 제거함으로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비폭력’, ‘아힘사’의 정신을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 불교는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출가하였을 당시 큰절에는 구산스님, 불일암에는 스님이 계셨다. 음력 설을 지나 곧장 출가했기 때문에 암자로 설 세배를 다닐 때에도 난 여전히 ‘속복행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불일암에 설 세배를 올라갔다. 스님은 털모자를 쓰고 나오셨다. 그런데 보통 우리들처럼 딱 달라붙게 쓰시는 게 아니라 모자 끝이 머리 뒤로 처져 내려오는 얇고 촘촘하게 짠 짙은 회색 모자에 아래엔 행전을 두르고 계셨다. ‘아, 서있는 사람들 뒷 표지의 모습 그대로시구나!’ 했다. 스님은 우리를 향해 “번거로운데 그냥 선채로 세배 하자. 행자기간은 평생 중노릇 할 농사를 짓는 일이니, 즐겁게 복을 지으라”하셨다.
한 산중에 있다고는 하지만 스님을 자주 뵙기는 어려웠다. 큰절의 행사나 공개적인 자리가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스님은 ‘일식 삼찬’을 철칙으로 삼으셨다 하는데, 실제 행자들이 불일암으로 올려 보내는 반찬은 깻잎, 검정콩조림, 연근조림 같은 며칠씩 두어도 잘 상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누군가, 김치는 독에 넣어 묻어놓고 드시기 때문에 마른 반찬 위주로 드리는 거라 했다. 아마 냉장고도 없지 싶었다. 행자들에게는 각각 소임이 있다. 그중에 가장 선망의 소임은 불일암 우편물 소임이었지만 나와는 영 인연이 닿지 않았다. 스님은 유머와 재치가 있으셔서 항상 주변을 즐겁게 해주셨다. 특히 꽃이나 나무부터 자연생태나 기후까지 다방면에 얘깃거리 많으셨다. 그런데 당신의 책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직접 언급하시 않으셨다.
<버리고 떠나기>의 출간 시점일까…, 스님의 거처가 강원도로 옮겨지고는 스님을 뵙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벌써 지난겨울의 일이 되어 버렸는가. 문중의 어른이 병에 차도를 보이지 않으시니 모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전에 스님을 마지막 뵈었을 때는 결과적으로 열반하시기 일주일 전이었다. “스님, 보경입니다.”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눈빛, 그 표정들은 여전하신데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을 잡아드렸니 힘줄 하나하나의 전율이 몸에 느껴졌다. 기운을 모아 가느다랗게 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다. “고생한다.” “글이 좋다.” 지난 가을에 책을 내고 길상사에 놓고 왔었는데 보셨던가 보다. 이 와중에도 나의 조그만 것까지 기억해주시구나 싶으니 목이 메어왔다. “스님, 일어나셔야지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열반소식을 듣고 뵈었을 때, 스님은 요 위에 얼굴만 드러낸 채 가사를 덮고 계셨는데,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이미 허공에 산화되신 듯 꽃가루처럼 자유롭게 느껴졌다.
열반소식을 듣고 뵈었을 때 스님은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이미 허공에
산화되신 듯 꽃가루처럼 자유롭게 느껴졌다”
장례절차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간명하게 공표되었다. 죽음은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인지, 생전에는 한 번도 주무시지 않았던 길상사에서 하루를 묵으시고 조계산으로 운구 되었다. 큰절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봉오리를 방울방울 달았고, 계곡의 물도 사람도 충분히 넘쳐나고 있었다. 관도 없고, 꽃상여도 만장도 없이, 낮은 평상에 가사 한 장만 덮은 법구는 도량을 돌아서 다비장으로 향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파격적인 장례는 형식을 초월하여 아무렇게나, 간소하게 하면 할수록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스님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다비가 시작되면서, “스님, 불 들어갑니다. 나오세요” 외치지만, 이미 스님은 그 속에 계실 것 같지 않았다. 스님은 젊어서 폐렴으로 고생하셨다고 하고, 만성이 된 천식이 있었음을 빈소에서야 비로소 들었다. 아궁이에서 하루 불을 지피며 마시는 연기의 해로움이 ‘담배 7갑’과 같다하니 산중생활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늦은 시간 용산역의 계단을 오르는데, 난 육신의 몸으로 걷지만 스님은 생각만으로도 오고가는 데 걸림이 없다는 차이, 하지만 이 차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임을 생각하자 슬프고 서러웠다.
책 절판의 용단은 ‘무소유’의 대단원이다. 이제 우주의 ‘빈(空)’ 역사에 기꺼이 드시겠다는 선언이고 보면, 스님은 우리보다 머리 하나 크기만큼 더 높이 계셨던가 보다. 인간은 더 낮아질 수 있고, 더 비울 수 있음을 스님은 응시하셨던 거다. 인간세는 모여들면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숙명이 있기에 스님은 송광사에 관련된 것 말고는 어떤 자리에도 오르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대중 강연회나 글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는 근면하셨으니, 이것은 이 시대의 우리가 스님께 지고 있는 커다란 빚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생각해보면 스님은 항상 행전을 차시고, 숲길에서도 팔을 힘차게 저으며 걸으셨다. 이제 불일암 비탈을 힘차게 오르시던 스님을 더 이상 뵐 수 없다. 불일암 주변의 허리 곧은 편백나무 숲과 암자의 경계를 둘러 서있는 대숲 바람이 스님을 또 얼마나 그립게 할지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아찔해진다. 이생에 무슨 복이 있어서 스님을 뵈었을까. 행복했던 만큼, 스님을 잊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스님, 빨리 다녀오셔야겠습니다!
보경스님 서울 법련사 주지
[불교신문 2608호/ 3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