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 둘레의 숲속에는 산토끼와 꿩들이 살고 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나를 믿어서인지 나를 보고는 놀라 달아나는 일이 없다. 눈이 많이 내려 쌓일 때면 가끔 콩 같은 걸 뿌려 주는데, 그런 때는 가까이 다가와 마음 놓고 주워 먹는다. 이런 걸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에 훈훈한 물기가 도는 것 같다. 그러나 낯선 사람을 보고는 이내 달아나 버린다. 어쩌다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뜰에서 어정거리는 꿩이나 토끼를 보면 그들은 반색을 한다. 식탁의 요릿감으로만 보여 잡아먹을 궁리나 하지 짐승이 같은 생물인 사람을 믿고 따르는 이웃의 정은 기르려고 하지 않는다. 순박한 짐승들은 이심전심의 묘리를 직감적으로 터득하고 있는 모양이다.
12월 초순인 요즘도 대숲머리에 있는 두 그루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강추위가 오기까지는 얼마 동안 더 달려 있을 것이다. 더러는 꿩과 새들이 쪼아 반쯤 허물어진 것도 있지만 나머지는 말짱한 그대로다. 벌써부터 보는 사람마다 왜 따지 않느냐고 입맛을 다시곤 했지만 나는 과일을 입으로만 먹지 않고 눈으로도 먹을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 실은, 내 뜰에 놀러 온 새들에게 따로 대접할 게 없으니 감이나 먹고 가라고 남겨 둔 것이지만, 나는 나대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초겨울 하늘 아래 발갛게 매달려 있는 감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앞산에 눈이라도 하얗게 내려 쌓이는 날, 빈 가지 끝에 매달린 저 감의 빛깔을 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그 기막힌 빛의 조화를. 큰절 문수전에 살던 혜담 스님은 한 해 겨울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신비로운 감의 빛깔을 보기 위해 비탈길을 미끄러져 가면서 일부러 올라오곤 했었다. 겨울철 빛깔의 조화치고는 일품이 아닐 수 없다. 입으로만 먹고 말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감맛을 볼 수 있었겠는가. 예이츠의 시에선가.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더니 아름다움 또한 눈으로 드는 것일레라.
겨울 숲은 부질없는 가식을 모조리 떨쳐 버리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약된 나무들의 본래 면목이다. 숲은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침묵을 딛고 일어선다. 봄날 움을 틔워 초록빛 물감을 풀어 수줍게 설레다가,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을 받아 서늘한 그늘을 대지에 드리운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익히면서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울긋불긋 서로 손짓하다가 마침내 미련 없이 낙하. 머리와 팔을 허공에 치켜든 채 이제는 말없이 묵상에 잠겨 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1982
옛날 어떤 임금의 이야기이다. 그는 사람이 죽은 뒤에는 ‘밤의 나라’에 가서 그곳의 왕인 ‘야마’에게 여러 재판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자기가 죽은 뒤에는 나라 안의 보배를 선물로 가져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갖은 방법으로 보물들을 모으려고 작정하고 보물이라고 이름 붙은 것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창고에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다.
이 나라에는 독자인 아들과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다. 그 아들의 아버지는 일찍이 죽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는 살림살이가 기울어져 그날그날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인물이 잘나고 재주도 뛰어난 아들은 그 나라 공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공주에게 무엇 하나 선물할 것이 없었다. 그 일을 슬피 여기고 근심한 나머지 아들은 마침내 병으로 앓아눕게까지 되었다.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외아들의 소원을 풀어 줄 수 있을지 궁리를 거듭했다.
“얘야, 우리 집은 요 몇 해 사이 가난뱅이가 되었지만 이것저것 내다 팔면 어떻게 안 될 것도 없을 게다. 그렇지만 요즈음 임금은 어찌 된 셈인지 나라 안에 있는 보물을 죄다 사들여 창고 속에 가득 쟁여 놓고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도 사 보낼 만한 보물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니?”
그러다 어머니는 문득 무슨 수라도 떠오른 듯 말했다.
“옳지! 참 얘야, 걱정 말아라. 우리에게도 보물이 있다.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저승의 야마왕께 바친다고 입에 금덩이를 하나 넣은 일이 있느니라. 그렇지. 그거면 될 게다. 어디 한번 찾아봐야겠다.”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던 끝에 죽은 남편의 무덤을 파기로 결심했다. 뼈만 흉하게 남은 무덤 속에서 마침내 금덩이를 얻을 수 있었다. 아들은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로 그것을 공주에게 가지고 가서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임금은 후원에서 공주와 같이 놀고 있는 젊은이와 금덩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나라 안에서는 이제 이와 같이 훌륭한 보물은 없을 텐데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거기에서 젊은이는 임금의 물음에 사실대로 모두 말해주었다. 임금은 젊은이의 말을 듣고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그랬던가! 단 한 개의 보물도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 창고 안에 가득 쌓인 보물인들 어떻게 가지고 갈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죽을 때는 야마왕 앞에 무엇을 선물했으면 좋을까?”
그때 마침 임금 곁에 어진 재상이 한 사람 있었다.
“상감마마, 이 세상에 있는 보물 중 무엇 하나 선물이 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야마왕은 무서운 얼굴로 꾸짖지만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부드러운 낯으로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상감마마께서 마련하실 가장 큰 선물은 나라를 잘 다스리시고 수행자와 가엾은 사람이나 가난한 이에게 ‘보시’를 하는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임금도 과연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장엄논경大莊嚴論經》 에서
이 글은 법정 스님께서 1998년 11월 1일에 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으로 어떤 책으로도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호에서 계속됩니다.
종교 없이도, 혹은 신앙을 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류 사회에 종교가 없고, 또 이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메마를지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인류 역사상 여러 종교의 교조나 성자들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류 사회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불타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인류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 것인가. 묻지 않아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인류 사회는 눈썹이 없는 얼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종교적인 세계에 투신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는 비생산자들이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거저 먹고, 만들어 놓은 옷을 공짜로 걸치고, 시주의 돈으로 지어 놓은 집에서 집세도 내지 않고 거저 살기 때문에 비생산적이요, 소비적이요, 기생寄生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물질로만 살아갈 수 있고, 물질만을 가지고 삶의 가치를 따질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소홀히 넘기기 쉬운 정신의 영역에 대한 탐구와 계발啓發은 눈에 보이는 경제 현상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때가 되니 어슬렁어슬렁 바리때를 들고 탁발을 하러 온 부처님에게 당신도 갈고 뿌린 다음에 먹으라는 바라문의 핀잔에, 나도 갈고 뿌린 다음에 먹는다고 한 부처님의 대답은 가시적可視的인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인간의 정신력을 계발하는 일은 마침내 단 이슬〔甘露, 즉 不死 〕 의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 믿음과 고행과 지혜, 부끄러운 줄 알고 불퇴전의 의지력과 신중한 언동과 음식을 절제하고 진실과 유화로써 삶의 지표를 삼는, 이런 ‘농사’야말로 얽히고설킨 온갖 고뇌로부터 우리를 해탈케 한다는 가르침이다.
사문沙門이란 범어 슈라마나 Śramana의 속어형俗語形인 사마나 Samana를 소리를 따라 적은 것이다. 온갖 악을 끊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착한 일에 힘쓰고,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리킨 말이다. 원래는 인도에서 출가자의 총칭으로 썼는데, 불교 경전에서 바라문 이외의 출가 수행자를 사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사문의 뜻이 말하고 있듯이, 출가 수행자의 기능을 할 때는 ‘나도 밭을 간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세상으로부터 기생충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도에서 행해졌던 이와 같은 걸식의 형태가 기후 풍토와 사회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오면 그대로 수용되기가 곤란했다. 놀고먹는 것을 악덕으로 여긴 우리네 전통적인 풍습에서는, 설사 출가 수행자라 할지라도 손수 논밭을 경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백장 선사 같은 분은 총림(수도원)을 개설하여 노동과 경작을 좌선이나 다름없이 중요시하게 되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교훈도 이런 환경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77의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로부터 시작하여 79에 이르는 ‘노력〔정진 〕 은 내 황소이므로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대답은, 수행자의 일상적인 생활 규범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를 읊어 얻은 것’, 즉 설법의 댓가를 받지 않겠다는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뜻. 법은 베푸는 것이지 파는 것이 아니다.
《보적경寶積經》 <가섭품 迦葉品>에서 부처님은 가섭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흔히 사문 사문 하는데 어떤 것이 진정한 사문沙門인가. 사문에는 다음 네 종류가 있다. 겉모양만 그럴듯한 사문, 점잖은 체하면서 남을 속이는 사문, 명예와 명성과 칭찬만을 구하는 사문,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 등이다.”
앞의 세 사문은 사이비이고 맨 나중의 사문이 진실한 사문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이란 어떤 것인가. 그는 몸이나 생명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자기 이익과 존경이나 명예에 대해서이겠는가. 열반조차도 원하지 않으면서 청빈한 수행자의 생활을 한다. 진리에 귀의하고 사람에게 귀의하지 않는다.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안으로 구하고 밖으로 찾아 헤매는 일이 없다. 미혹의 바다에서 자기 자신을 의지할 섬으로 삼고 타인을 섬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열반의 상태에 있음을 알아, 윤회에 유전하지도 않고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이다. 진실한 수행에 의해서만 사문의 덕행이 갖추어지는 것이지, 이름만의 수행에 의해서는 그리될 수 없다.”
바라문 바라드바자가 스승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한 말.
“놀라운 일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혹은 눈이 있는 자는 빛을 보리라 하여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고타마 당신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뛰어난 가르침에 대해서 진심으로 찬탄하고 귀의한 바라드바자의 이와 같은 표현은 뒷날 《아함경》에서 찬탄과 귀의의 형식으로 굳어지게 된다.
‘태어나는 일은 이제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제 또다시 이런 생존을 받지는 않는다’고 한 말은 다시는 더 윤회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는 선언이다.
우리는 어째서 윤회를 되풀이하는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밖으로 밖으로만 헛된 것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밖으로 팔았던 눈을 안으로 돌이켜라. 잠든 자기 자신의 영혼을 불러 깨우라. 누가, 무엇이 그대를 묶어 놓았는가.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법정 스님께서 1998년 11월 1일에 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으로 어떤 책으로도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호에서 계속됩니다.
사람마다 나름의 고유한 생활 방식이 있듯이 죽음에 이를 때도 나름의 방식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순간순간 소멸되는 그 시간을 누군가 곁에서 함께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을 함께 체험한다면 죽어 가는 사람에게 아주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배워야 합니다.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내 몸뚱이 안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의 껍데기입니다.
죽음도 삶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거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잎이 지면 그 자리에 새 움이 돋는 것은 우주의 리듬이고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 때는 죽음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철저히 살아야 합니다. 또 죽게 되면 미련을 갖지 말고 다시 내생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살 때도 어중간하게 살고 죽을 때도 벌벌 떨면서 죽으면 이도저도 아닙니다. 적어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확고한 생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말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수도를 많이 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어떤 정신으로서 사느냐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백 살까지 산 스코트 니어링이라는 사람이 죽자 아내 헬렌 니어링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남편에 대한 기록을 출간합니다. 이 책에 스코트 니어링이 <주위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고 남긴 글이 있습니다.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다가왔을 무렵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도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의 조용함,위험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추어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 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의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서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누이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나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보이는 우리 땅 나무 아래에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로 공감되는 바가 많았습니다. 요즘 절에서 큰 스님 작은 스님 할 것 없이 중들 죽으면 얼마나 요란들 떱니까? 수십 억 들여서 무슨 탑을 만들고 비를 세우고 하는데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평소 살아서도 시주 은혜를 입은 사람이 죽은 후에까지 아무것도 아닌 뼈 몇 조각, 재 한 줌 남은 것 가지고 왜 또 시주 신세를 지느냐 이겁니다.
(끝)
“나는 중이 되지 않았으면 목수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불일암에 들어가 만든
의자는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말짱하다. 장작더미
속에서 쓸 만한 참나무 통장작을 고르고 판자 쪽을
잇대어 만든 것인데, 사용 중에 못이 헐거워져
다시 박은것 말고는 만들 때 그대로다.”
-《오두막 편지》에서, 1998년
은사 스님께서 손수 만드신 빠삐용 의자는 이렇게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방문객이 앉으면 부서질 위험이 있어 불일암에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소박한 그 마음 느껴지나요?
이때 선재동자는 무진장엄 복덕장 해탈 광명을 얻었다.
복덕의 큰 바다를 생각하고,
복덕의 허공을 관찰하고,
복덕의 마을에 나아가고,
복덕의 산에 오르고,
복덕의 광을 붙들고,
복덕의 연못에 들어가고 노닐었다.
복덕의 바퀴를 깨끗이 하고,
복덕의 장 藏 을 보고,
복덕의 문에 들어가고,
복덕의 길에 다니고,
복덕의 종자를 닦으면서
대흥성에 이르러 명지 거사를 찾았다.
선재는 선지식에게 갈망하는 마음을 내고,
선지식으로 그 마음을 닦고,
선지식을 향한 뜻이 견고해졌다.
방편으로 선지식을 찾으려는 마음이 물러나지 않고,
선지식을 섬기려는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으며,
선지식을 의지하기에 착한 일들이 가득 채워졌다.
선지식을 의지하므로 복이 생기고,
선지식을 의지하므로 행이 자라고,
선지식을 의지하므로 타인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선지식을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선근이 자라고,
깊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근기와 성품을 늘게 하고,
덕의 근본을 더하게 하고,
큰 소원이 보태지고,
큰 자비가 넓어지고,
온갖 지혜에 가까워지고,
보현의 도를 갖추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밝게 비추고,
여래의 열 가지 힘과 광명이 더욱 늘어났다.
선재는 이때 그 거사가 성안의 네거리 칠보대 위의 무수한 보배로 장식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선재는 그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 합장하고 서서 말했다.
“성자시여, 저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습니다.
중생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을 끝까지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을 생사의 바다에서 뛰쳐나오게 하기 위해서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습니다.
또 모든 중생을 법의 보물섬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애욕의 강을 말리기 위해서,
중생이 큰 자비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중생이 애욕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르게 하기 위해서,
중생을 생사의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이 부처님의 공덕을 좋아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을 삼계의 성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서,
중생을 온갖 지혜의 성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도를 닦으며,
어떻게 중생의 의지처가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거사가 말했다.
“장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구나.
위없는 보리심을 발한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우나,
이 마음을 내면 그는 능히 보살행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선지식을 만나는 데 싫증을 내지 않을 것이고,
선지식을 가까이함에 게으름이 없을 것이며,
선지식을 공양함에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선지식을 시중들어도 근심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고,
선지식을 찾음에 끝내 물러남이 없을 것이며,
선지식을 생각해 끝내 버리지 않을 것이고,
선지식을 섬기되 잠깐도 쉬지 않을 것이다.
선지식 우러르기를 그칠 때가 없을 것이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행함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며,
선지식의 마음을 받들어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선남자여, 그대는 지금 내 대중을 보는가?”
“예, 봅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사막에서도
나를
살게 하셨습니다.
쓰디쓴 목마름도
필요한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내 푸른 살을
고통의 가시들로
축복하신 당신
피 묻은
인고의 세월
견딜힘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그 어느 날
가장 긴 가시 끝에
가장 화려한 꽃 한 송이
피워 물게 하셨습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생명은 늘 새롭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법정 스님
«맑고 향기롭게»는 이렇게 만듭니다. 법정 스님이 쓰신 글, 써 두셨던 글, 하신 말씀, 쓰던 물건을 전합니다. 덕조 스님이 간직한 법정 스님의 미발표 원고를 세상에서 처음 싣습니다. 달마다 새 글을 올려 맑고 향기롭게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법정 스님 당부를 지켜 종이를 눈곱만큼도 버리지 않는 제본, 곧 국산 아르테160그램 용지를 9번 접어서 20쪽 서첩으로 제작합니다. 화학풀을 쓰지 않고, 화학 약품 코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 젖고 잘 찢어지고 빨리 썩습니다. 한 달 동안 세워 놓고 보고 읽고 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과 뜻을 함께하는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가 제작 비용을 보탭니다. 월간 «맑고 향기롭게»는 꼭 할 말만 싣고 돈을 아끼면서 환경을 지킵니다.
2022년 12월 1일 발행, 통권 334호, 신고번호 성북라00004호, 1999년 6월 23일 등록. 발행 편집인 / 덕조, 기획 편집 디자인 / 지식을만드는지식, 발행처 / 맑고 향기롭게 모임.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선잠로 5길 68(성북동 323번지) 길상사 내. 전화 02 741 4696 팩스 02 741 4698, 인쇄 / 영신사. 맑고 향기롭게 대구 모임 053 753 8883, 경남 모임 055 266 0170, 광주 모임 062 236 3129,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clean94.or.kr 전자우편 clean94@hanmail.net. 길상사는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도우려고 법정 스님이 세운 절입니다. 전화 02 3672 5945 팩스 02 3672 5947 홈페이지 http://www.kilsangsa.or.kr 전자우편 kilsangs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