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로 불렀다. 평원에 들짐승들의 자취가 뜸해지고 나무에서 잎이 떨어져 내린다. 지상에 무성했던 것들이 수그러든다. 그렇지만 모두 다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한동안 비웠다가 때가 되면 다시 채워질 것들이다.
11월이 내 둘레에서는 개울가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달이다. 첫서리가 내린 아침 적갈색 다기를 내놓았는데, 며칠을 두고 써 보아도 정이 가지 않는다. 쓰임새도 좋고 모양도 그만한데 웬일인지 그릇에 마음이 붙지 않는다.
이 일을 두고 생각하니 인간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오랜 세월 오며 가며 지내도 정이 가지 않고 떨떠름한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는데도 서로 마음의 길이 이어져 믿고 따르는 사이도 있다. 한때는 맹목적인 열기에 들떠 결점도 장점으로 착각하기 일쑤지만 그 열기가 가시고 나면 밝은 눈으로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월이 눈을 뜨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보다 나무와 꽃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산에서 살면 동물보다 식물을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식물은 동물에 비해서 그 속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자연스럽다. 정직하고 진실한 덕과 시원한 그늘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무와 꽃들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그 시기를 잘 안다. 결코 어기는 일이 없다.
오두막 뜰가에 소나무가 네 그루 정정하게 자라고 있는데 그중 한 나무에 전에 없이 솔방울이 많이 매달렸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몇 해 전 폭설로 한쪽 가지가 꺾여 나간 바람에 맞은쪽 가지의 무게 때문에 나무가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나무는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뒤를 잇도록 씨앗이 담긴 솔방울을 많이많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탐욕스런 사람들보다는 나무 쪽이 훨씬 지혜롭다. 이 산중에서 함께 사는 인연으로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받침대를 해 주었다. 내가 곁에서 거들 테니 걱정 말고 잘 지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소나무는 가지에 보름달을 올려 한밤중에 나를 불러내었다. 이래서 산에서 사는 나는 사람보다도 나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고대 인도의 위대한 왕, 아소카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국민에게 치유력이 있는 약나무와 열매를 맺는 유실수와 연료로 쓸 나무, 집을 짓는 데 쓸 나무, 꽃을 피우는 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했다. 아소카 왕은 그것을 ‘다섯 그루의 작은 숲’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까지 몇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았는가. 우리나라 기후로는 입동 무렵이 나무를 옮겨 심기에 가장 적합한 때다. 그리고 나무들이 겨울잠에 들기 시작하는 이때가 거름을 주기에도 알맞은 때다. 나무를 심고 보살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2008년 11월.
11월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로 불렀다. 평원에 들짐승들의 자취가 뜸해지고 나무에서 잎이 떨어져 내린다. 지상에 무성했던 것들이 수그러든다. 그렇지만 모두 다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한동안 비웠다가 때가 되면 다시 채워질 것들이다.
11월이 내 둘레에서는 개울가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달이다. 첫서리가 내린 아침 적갈색 다기를 내놓았는데, 며칠을 두고 써 보아도 정이 가지 않는다. 쓰임새도 좋고 모양도 그만한데 웬일인지 그릇에 마음이 붙지 않는다.
이 일을 두고 생각하니 인간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오랜 세월 오며 가며 지내도 정이 가지 않고 떨떠름한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는데도 서로 마음의 길이 이어져 믿고 따르는 사이도 있다. 한때는 맹목적인 열기에 들떠 결점도 장점으로 착각하기 일쑤지만 그 열기가 가시고 나면 밝은 눈으로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월이 눈을 뜨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보다 나무와 꽃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산에서 살면 동물보다 식물을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식물은 동물에 비해서 그 속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자연스럽다. 정직하고 진실한 덕과 시원한 그늘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무와 꽃들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그 시기를 잘 안다. 결코 어기는 일이 없다.
오두막 뜰가에 소나무가 네 그루 정정하게 자라고 있는데 그중 한 나무에 전에 없이 솔방울이 많이 매달렸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몇 해 전 폭설로 한쪽 가지가 꺾여 나간 바람에 맞은쪽 가지의 무게 때문에 나무가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나무는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뒤를 잇도록 씨앗이 담긴 솔방울을 많이많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탐욕스런 사람들보다는 나무 쪽이 훨씬 지혜롭다. 이 산중에서 함께 사는 인연으로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받침대를 해 주었다. 내가 곁에서 거들 테니 걱정 말고 잘 지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소나무는 가지에 보름달을 올려 한밤중에 나를 불러내었다. 이래서 산에서 사는 나는 사람보다도 나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고대 인도의 위대한 왕, 아소카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국민에게 치유력이 있는 약나무와 열매를 맺는 유실수와 연료로 쓸 나무, 집을 짓는 데 쓸 나무, 꽃을 피우는 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했다. 아소카 왕은 그것을 ‘다섯 그루의 작은 숲’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까지 몇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았는가. 우리나라 기후로는 입동 무렵이 나무를 옮겨 심기에 가장 적합한 때다. 그리고 나무들이 겨울잠에 들기 시작하는 이때가 거름을 주기에도 알맞은 때다. 나무를 심고 보살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2008년 11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마가다국 남산에 있는 ‘한 포기 띠[茅]’라고 하는 바라문 촌에 계셨다.
그때 밭을 갈고 있던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씨를 뿌리려고 오백 개의 쟁기를 소에 매었다.
스승께서는 오전 중에 바리때와 가사를 걸치고, 밭을 갈고 있는 바라문 바라드바자에게로 가셨다.
때마침 그는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었으므로 스승은 한쪽에 섰다.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음식을 받기 위해 서 있는 스승을 보고 말했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당신도 밭을 가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으십시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항상 시작되는 구절이다.)
(*사문은 당시 힌두교 정통 사제인 바라문의 권위와 형식주의에 반대하여 강변과 숲속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던 자유사상가적인 수행자이다.)
스승은 대답하셨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
바라문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 고타마의
쟁기나 호미, 작대기나 소를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라고 하십니까?”
이때 밭을 갈던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시詩로써 스승에게 여쭈었다.
76 “당신은 농부라고 자처하지만 우리는 일찍이 밭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당신이 밭을 간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듣도록 말씀해 주시오.”
77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에게 믿음은 씨앗이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쟁기와 호미, 부끄러움은 호미 자루, 의지는 쟁기를 매는 줄, 생각은 호미 날과 작대기입니다.
78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실을 김매는 일로 삼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내 소를 쟁기에서 떼어 놓습니다.
79 노력은 내 소이므로 나를 절대 자유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80 이 밭갈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고 단 이슬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단 이슬[甘露]’은 죽지 않는 것[不死]을 뜻한다.)
이때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커다란 청동靑銅 그릇에 우유죽을 하나 가득 담아 스승께 올렸다.
“고타마께서는 우유죽을 드십시오.
당신은 진실로 밭을 가는 분이십니다.
당신 고타마께서는 단 이슬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81 “바라문이여,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나는 먹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르게 보는 사람들(눈뜬 사람들)의 법이 아닙니다.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눈뜬 사람들은 받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법도를 따르는 이것이 바로 눈뜬 사람들의 생활 태도입니다.
(*여기서 ‘시를 읊어’란 설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설법을 하고 보수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82 완전에 이른 사람, 위대한 성자, 번뇌의 더러움을 다 없애고 나쁜 행위를 소멸시켜 버린 사람에게는 다른 음식을 바치십시오. 그것은 마침내 공덕을 바라는 이에게 더없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고타마시여, 이 우유죽을 저는 누구에게 드려야 합니까?”
“바라문이여, 신, 악마, 범천梵天들이 있는 세계에서 신, 인간, 사문, 바라문을 포함한 여러 중생 가운데서 완전에 이른 사람[如來]과 그의 제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이 우유죽을 먹고 소화시킬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이 우유죽일랑 생물이 없는 물속에 버리십시오.”
그리하여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그 우유죽을 생물이 없는 물속에 쏟아 버렸다. 그런데 그 우유죽을 물속에 버리자마자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끓어올랐다. 마치 온종일 뙤약볕에 쬐여 뜨거워진 호미 날을 물속에 넣었을 때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이는 것과 같았다.
이때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온몸이 오싹하여 두려워 떨면서 스승 곁에 다가섰다.
그리고 스승의 두 발에 머리를 숙이며 여쭈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또는 ‘눈이 있는 사람은 빛을 보리라’ 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도를 닦는 수행자들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타마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具足戒]을 받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부처님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바라드바자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홀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수행의 최종적인 목표를 -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 집 없는 상태가 된 것인데-이 생에서 깨달아 증명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태어나는 일은 이제 끝났다. 수행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제 또다시 이런 생사를 받지 않는다’라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바라드바자 장로는 성인聖人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강론〕
예전부터 출가 수행자는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다. 만약 출가 수행자가 농사를 짓거나 혹은 뭘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한다면 그는 청정한 출가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가 없다.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땀 흘려 애써 일하는 입장에서 보면, 놀고먹는 무리가 어쩌면 사회의 기생충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하나같이 생산직에만 종사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를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병들고 말 것이다.
각자 기능과 역할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사회 구조이고 보면, 사람마다 주어진 개인의 직능과 의무 혹은 사명이 곧 사회적인 조화를 이루는 데 한몫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종교학자는, 사람의 얼굴로써 비유를 들면서 종교는 마치 눈썹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입은 먹고, 코는 숨 쉬고 냄새 맡는다. 눈썹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썹은 눈을 보호한다. 그리고 뭣보다도 눈썹이 없으면 사람의 얼굴이 될 수 없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법정 스님께서 1998년 11월 1일에 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으로 어떤 책으로도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호에서 계속됩니다.
우리 몸이 세월이 흐르면 달라집니다.
그전 같으면 말짱할 텐데 조금 삐끗하거나 무거운 것을 들다가 충격을 받으면 탈이 납니다. 평소 몸을 움직여 버릇 하면 그런 일이 없는데 남한테 일을 시켜 버릇하면 우리 능력이 자꾸 소멸되고 뼈가 약해져서 걸핏하면 그런 골절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뼈를 사용하는 적당한 활동을 하지 않으면 뼈 속에서 칼슘이 용해된대요. 이게 피 속으로 흘러 나가 대소변으로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우주 비행사들의 실험을 통해 이런 게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활동을 하지 않으면 자연히 공기 중에 있는 산소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심장의 수축 작용에 의해 혈액 양이 또 감소된다고 해요. 따라서 피 속 적혈구도 그 용량이 감소된대요. 그래서 더욱 노화가 촉진된다고 합니다.
몸을 사용하지 않는 데서 오는 이와 같은 증상을 의학 용어로 폐용 증후군, 쓸모없어서 한쪽으로 제껴 놓는 그런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폐물 증후군에 걸린다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폐차장에 쌓아놓은 자동차의 잔해를 연상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운동이나 훈련은 젊은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겁니다.
나는 지금 몇 년째 혼자 살고 있어요. 내가 나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데 세어 보니 벌써 예순다섯 살이 지났어요. 그러니까 노년기입니다.
장을 보러 가면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저한테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처음에는 그 소리 듣고 충격 받았는데 이제는 당연하게 들려요.
처음 할머니나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면 내가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저항감 같은 것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주 질서예요. 그런 사회적 인습이나 육신의 호칭에 우리는 팔릴 필요가 없어요.
20대 30대도 늙은이 놀이 하는 사람도 있고 60대 70대에서 청년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기상을 가지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의해 실질적인 연륜이 달라지는 것이지 육신의 나이에 의해 이건 노년기다 청년기다 장년기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될 수 있으면 누구한테 일을 시키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합니다. 여럿이 살면 후배들한테 맡길 일도 혼자 살기 때문에 내가 다 해요. 장작도 패고 밭일도 하고. 그러다 보니 별로 지칠 줄을 몰라요.
좋은 산천에 사니까 그 산이 지니고 있는 기운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럿이 어울려 살 때보다 훨씬 건강 상태가 좋기도 해요.
이는 뭘 얘기하는가 하면 사람은 적당히 움직여야 된다는 거예요. 정년퇴직했다고 해서 그날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한가하게 노인정 할아버지나 할머니처럼 처신하면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잠재력이 해소되어 버려 폐물 증후군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 늙음과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 수 있으면 돼요. 내 나이가 몇이라든가 또 손주가 몇이라든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그 틀에 갇혀서 사람으로서 충분한 활동력이 있는데도 스스로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 데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이것은 신체적 활동만이 아니라 두뇌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작용을 맡은 대뇌 반구도 나이 들면서 위축이 된대요. 그 대뇌 속에 있는 세포도 자극을 줘서 사용하지 않으면 세포는 있어도 활동이 쇠퇴된다고 해요.
따라서 노인이 손발을 쓰지 않고 지능을 개발하고 책을 읽거나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게 되면 치매가 빨리 온대요. 할 일이 있게 되면 늘 의식이 활동하고 있고 손발을 쓰고 있는 한은 그게 더디답니다. 이게 의학적인 통계예요.
내가 자꾸 늙음과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이게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고 우리가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런 삶의 자세를 갖자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11월입니다. 계절만 11월이 아니고 우리 인생의 세월도 11월이에요.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피할 게 아니고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은사 스님은 삭발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맑고깨끗한 모습을 유지하셨습니다.
삭발을 자주 하시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삭발을 하면 그때마다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다.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생각을 씻어 버리기 위해 나는
또 삭발을 한다. 삭발하고 목욕하고 난 뒤면 개운하고
홀가분해져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은 의욕이 솟는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과거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
선재동자는 구족 청신사를 보고 그 발에 엎드려 절하고 합장하고 서서 말했다.
“성자시여, 저는 이미 위없는 보리심을 발했지만,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어떻게 보살도를
닦는지 알지 못합니다. 듣건대 성자께서는 잘 가르쳐 주신다 하오니, 저에게 말씀해 주소서.”청신사가 말했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무진 복덕장 해탈문을 얻었으므로, 이와 같이 작은 그릇 하나만으로도
중생의 갖가지 요구에 따라 온갖 맛있는 음식으로 그들 모두를 배부르게 한다.
하지만 시방세계의 중생을 그들의 요구에 따라 모두 배부르게 해도,
이 음식은 다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음식으로 그러하듯이 갖가지 좋은 맛, 갖가지 자리,의복·침구·수레·꽃향기, 갖가지 가재 도구들도
좋아하는 대로 모두 가득 채워 준다.
또 가령 동방의 어떤 세계에 있는 성문이나 독각이 내 음식을 먹으면 모두 성문이나 벽지불과辟支佛果를
얻어 최후신最後身에 머문다. 동방이 그러하듯이 남방 서방 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 하방도 그와 같다.
또 무수한 세계에 있는 일생보처 보살이 내 음식을 먹으면, 모두 보리수 아래 도량에 앉아
마군의 항복을 받고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다.
선남자여, 그대는 나의 이 동녀들을 보는가?”
“보고 있습니다.”
“선남자여, 이 동녀들이 상수上首가 되듯이,이와 같은 백만 아승지 권속들이 모두 나와 함께
행이 같고 원이 같고 선근이 같고 벗어나는 길이 같다. 청정한 이해가 같고,
청정한 생각이 같고, 청정한 길이 같고, 한량없는 깨달음이 같고, 모든 감관을 얻음이 같고,
광대한 마음이 같고, 행하는 경지가 같고, 이치가 같고, 뜻이 같고, 분명히 아는 법이 같고,
깨끗한 모습이 같고, 한량없는 힘이 같고, 끝까지 정진함이 같고, 바른 법음이 같고, 종류를 따르는 음성이 같다.
청정하고 제일가는 음성이 같고, 한량없이 청정한 공덕을 찬탄함이 같고, 청정한 업이 같고, 청정한 과보가 같다.
대자大慈가 두루 해 모든 것을 구호함이 같고, 대비大悲가 두루 해 중생을 성숙시킴이 같고,
청정한 몸의 업이 인연을 따라 모은 것이 보는 이를 기쁘게 함이 같다.
청정한 입의 업으로 세상의 말을 따라 법으로 가르침이 같고, 모든 부처님의 대중이 모인 도량에 나아감이 같고,
모든 부처님 세계에 가서 부처님들께 공양함이 같고, 모든 법문을 나타내 보임이 같고,보살의 청정한 행에 머무름이 같다.
선남자여, 이 수많은 동녀들은이 그릇에 좋은 음식을 담아 한 찰나에 시방세계에 두루 가서 최후신을 받은 보살과
성문·독각들에게 공양하며, 여러 아귀들까지도 모두 배부르게 한다.
이 동녀들이 이 그릇을 가지고 천상에 가면 천인들을 넉넉하게 먹이고, 인간에 가면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인다.
잠시만 기다리면 그대가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할 때 끝없는 중생이 사방의 문으로 들어오니 모두 가 이 청신사의 본래 소원으로 청한
이들이었다. 청신사는 들어오는 이마다 자리를 펴서 앉게 하고, 그들의 뜻대로 음식을 주어 모두를 배부르게 했다.
그러고 나서 선재동자에게 말했다.
“나는 다만 이 무진 복덕장 해탈문을 알 뿐이지만, 저 보살 마하살들의 모든 공덕은 큰 바다와 같아 그 깊이가 한이 없다.
허공과 같아 드넓기 끝이 없고, 여의주와 같아 뭇 중생의 소원을 다 만족케 하고,
큰 마을과 같아 구하는 것을 거기서 모두 얻고, 수미산과 같아서 온갖 보배가 두루 쌓여 있다.
깊은 고방과 같아 법의 재물을 항상 쌓아 두고, 밝은 등불과 같아 어둠을 없애며, 높은 양산과 같아 중생을 가려 주는 일들이야
내가 어떻게 알며 그 공덕을 다 말하겠는가.
선남자여, 남쪽으로 가면 대흥大興이라는 성이 있는데, 거기 명지거사明智居士가 있다.
그대는 그를 찾아가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어떻게 보살도를 닦느냐’고 물으라.”
선재동자는 그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 떠났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장갑을 끼어도
손이 시린 겨울
털양말 신어도
발이 시린 겨울
동상 걸린 발로 괴로워해도
겨울은 나를 강하게 했다
힘든 것을 견뎌 내는
지혜를 주었다
추위가 없는 겨울엔
추위가 그립다
나의 삶에서
탄력을 앗아 가는
편리하고 편안한 겨울을
문득 원망해 보는 오늘
숲에는 질서와 휴식이,
그리고 고요와 평화가 있다.
숲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안개와 구름, 달빛과 햇살을 받아들이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깃들일
보금자리를 베풀어 준다.
숲은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할퀴는 폭풍우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것이 숲이 지니고 있는 덕이다.
-법정 스님
«맑고 향기롭게»는 이렇게 만듭니다. 법정 스님이 쓰신 글, 써 두셨던 글, 하신 말씀, 쓰던 물건을 전합니다. 덕조 스님이 간직한 법정 스님의 미발표 원고를 세상에서 처음 싣습니다. 달마다 새 글을 올려 맑고 향기롭게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법정 스님 당부를 지켜 종이를 눈곱만큼도 버리지 않는 제본, 곧 국산 아르테160그램 용지를 9번 접어서 20쪽 서첩으로 제작합니다. 화학풀을 쓰지 않고, 화학 약품 코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 젖고 잘 찢어지고 빨리 썩습니다. 한 달 동안 세워 놓고 보고 읽고 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과 뜻을 함께하는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가 제작 비용을 보탭니다. 월간 «맑고 향기롭게»는 꼭 할 말만 싣고 돈을 아끼면서 환경을 지킵니다.
2022년 11월 1일 발행, 통권 333호, 신고번호 성북라00004호, 1999년 6월 23일 등록. 발행 편집인 / 덕조, 기획 편집 디자인 / 지식을만드는지식, 발행처 / 맑고 향기롭게 모임.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선잠로 5길 68(성북동 323번지) 길상사 내. 전화 02 741 4696 팩스 02 741 4698, 인쇄 / 영신사. 맑고 향기롭게 대구 모임 053 753 8883, 경남 모임 055 266 0170, 광주 모임 062 236 3129,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clean94.or.kr 전자우편 clean94@hanmail.net. 길상사는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도우려고 법정 스님이 세운 절입니다. 전화 02 3672 5945 팩스 02 3672 5947 홈페이지 http://www.kilsangsa.or.kr 전자우편 kilsangs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