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법사가 법성사에서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는 육조혜능이 신분을 감추고 잠시 객승으로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혜능이 경내를 걷고 있었는데 학승 둘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았더니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찰 어귀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오.”
“무슨 소리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지.”
두 사람은 자기 말만 내세울 뿐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그대들 마음이오.”
혜능이 한마디 거들자 두 학승이 다툼을 멈추고 혜능을 바라보았다.
“바람의 성품이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깃발의 성품 또한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니오. 바람과 깃발의 성품이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그대들이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보고 바람이니 깃발이니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들 마음이 지어낸 분별일 뿐인 것이오.”
지나가던 인종법사가 혜능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인종법사는 바로 혜능을 방으로 불러들여 내력을 물었고,
그가 오조홍인에게서 가사와 의발을 전수받은 혜능이라는 것을 알고 기꺼이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그 시절에도 절간 안에 법문이나 강회를 알리는 내용을 깃발에 적어 내걸어두었고
그것을 사람들은 찰번刹幡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한문漢文이 오랜 세월 세로쓰기를 해온 것을 감안한다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깃발은 당연히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을 것이고
또한 바람에 날리도록 되어있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절간은 물론이고 바깥세상에서도 ‘번幡’이란 말은 거의 죽은 말이 되어버렸다.
그 대신 플래카드placard라는 외래어와 그 순화어인 현수막이란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는 형편인데,
글씨 또한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뀐 세태를 반영하여
한결같이 옆으로 길게, 그리고 팽팽하게 거는 것이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도심이나 산중을 가리지 않고
사찰에서 가로쓰기 현수막을 전각의 중요 부분에 팽팽하게 당겨 내거는 것은
결코 여법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풍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곳이든 절과 절을 찾아가는 길은 성소로서의 위의를 갖추고 있어서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인데,
편의주의와 이기주의와 성과주의에 쫓겨 세련되지도 세심하지도 못하게 마음을 쓴 결과로
성소를 찾아온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돌아서는 마음에 주름이 생기게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절간을 찾아오는 이들이 비단 불자만이 아닐 것이라고 본다면
국보나 보물에 관계하는 이들은 나라살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흉을 볼 것이고,
산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수령 많은 수목을 아낄 줄 모른다고 탓을 할 것이며,
신심 깊은 불자들이라 하더라도
불보살님 모셔둔 곳의 편액 위에 숨쉴 틈 없이 팽팽하게 당겨 건 현수막을 보고 나서는
마음 편히 합장하고 예배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오늘날의 절집에서는 어쩌자고 한결같이 싸구려 선전막 같은 현수막을
주요 전각의 머리맡에 내걸어두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찰을 찾아온 이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어야 할 것이 현수막은 아닐 터이다.
더구나 그 안에 적은 내용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불보살을 모셔둔 전각의 이름을 가려도 좋을 만큼 귀하고 급한 것도 아닐 것이며,
바깥세상 사람들의 구제와 구도를 위한 자비행의 표현이라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사찰 재정에 보탬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잘하는 것 같지 않은 일임에 있어서랴.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또 원만무결하고 청정한 범행을 설하라.
부처님의 전도선언 중에 한 구절이다.
그런데 어찌 법을 전하는 말 하나 뿐일 것인가.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시켜줄 수 없는 것이다.
바른 의도를 냈다면 바른 행을 통해 그것을 이뤄야 할 것이므로.
그런 면에서 최근 삼각산 자락 한 사찰에서 생각 깊어 보이는 현수막을 보았을 때,
얼핏 떠오른 생각이 찰번刹幡의 부활이었다.
육조혜능의 ‘비풍비번非風非幡’에 얽힌 깨달음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고,
절간의 고요와 청정을 해치지도 않을 것이며,
나아가 공간의 유효한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유용할 것이었다.
숲은 숲대로 길은 길대로 전각은 전각대로
제 가진 품위와 풍치를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읽어야 하는 가로쓰기 현수막 대신
바람에 펄럭이는 여유가 있는 찰번刹幡의 부활과 이용을
절 식구들이 마음을 내서 깊이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 인터넷 불교신문 "불교포커스"에 올라온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