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976년 서울 청년회의소(NGO) 한 분과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을 때이다. 우리의 각 분과는 그 현안 따라 각 분과별로 사회와 지역에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속한 분과가 정기적으로 일본 젊은이들과 합동으로 봉사하는 기간은 여름철이 닥쳐오는 6월경이었다. 이때 일본 청년회의소와 연결하여 문제를 의논하고 사전 조율을 한다. 그때 우리나라 의료사정은 대단히 열악했다. 그때 의안은 시골 오지사람들의 구강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정부 보건복지부와 연결하여 어느 지역이 가장 의료 환경이 열악한 지역인가를 통보받아 우리는 사전 그 지역을 조사하고 봉사활동에 나섰다.
일본 청년회의소 치과의사들이 5,6명이 오고 우리 회원 중 치과 의사들이 2,3명이 참여하여 치과 봉사활동을 나섰다. 그 당시 영월의 열악한 의료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치과가 한 곳도 없다. 우리가 버스로 도착한 곳은 영월의 조그마한 초등학교였는데, 사전 그 지역에 통보를 해두었기 때문에 주민들도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실에 의료장비를 정돈하고 이곳에서 하루 종일 지역 주민 상대로 구강을 진료했다. 이가 썩었는데도 이를 뽑지 못해 얼굴이 퉁퉁 부은 사람, 치암齒癌이 걸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람(당사자는 치암인 줄 모르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볼이 부어 얼굴 형태까지 변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 지역 주민들의 이를 뽑고 치료를 하고 나면 좀 과장하여 이가 큰 바켓츠에 가득 찰 정도였다. 우리 회원 치과의사들은 물론이지만 일본 청년 치과 의사들과 회원들은 하루 종일 묵묵히 봉사활동을 했다. 우리들은 간호사 자격 없는 간호사들이었다.
봉사활동을 마친 다음 날은, 우리는 각자 직장에 출근하기 전 아침 6시에 모였다, 전날 봉사활동의 과정과 결과를 점검하는 토의와 다음 봉사활동의 기간과 장소 등을 결정하는 예비 토의와 토론을 했다.
일본 치과 의사들과 일본 회원들의 소감을 발표했다. 그들은 한국 사람에 대한 애정표시를 아주 겸손하게 발표했다. 그들도 자기들 직장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도 직장에 휴가를 내고, 모든 경비를 자신이 부담하면서 이웃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참여하는 자세에 대하여……. 우리는 당시 세계경제 대국인 일본인들에 대한 열등감에, 어쩌면 시기심이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우리가 그들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이웃나라 순수한 젊은이들에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우리도 일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언제든지 요청하면 우리가 도울 의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솔직히 그 당시 나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의료형태를 일본인들에게 내보이고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데 마음이 몹시 불편했고 속이 상했다. 나의 성숙하지 못한 옹졸한 마음이 발로였던 것이다.
며칠 전에 일어난 일본의 지진 피해는 안타깝다. 우리는 이웃나라 사람들을 위해 어떤 방법이든지 진정으로 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