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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 10-03-26

    [문화일보 3.24] 결식가정에 밑반찬 지원, 맑고향기롭게 봉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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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게재 일자 : 2010년 03월 24일


<사랑 그리고 희망 - 2010 대한민국 리포트>


“법정스님 입적 때도 안쉬었죠”…


이웃 위해 썰고 볶은 10년


사랑·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 결식가정에 밑반찬 지원 ‘맑고 향기롭게’ 봉사자들

박세영기자 go@munhwa.com



▲ ‘맑고 향기롭게’ 소속 밑반찬 자원봉사자들이 지난 18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경내 조리장에서 새우 마늘종 볶음을 비롯한 결식가정 지원용 밑반찬을 만들고 있다.

“여기 검정색 가방은 두 개씩 넣어 주세요”, “뜨거우니 식혀서 넣어야겠네.”


지난 18일 오전 11시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음식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냄새가 사찰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주차장 한쪽에 마련된 조리장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였다. 법정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한 지 불과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님의 무소유, 나눔정신을 실천에 옮겨 온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에 소속된 자원봉사자들은 손을 바삐 놀리며 음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결식가정을 생각하면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날 메뉴는 무 생채와 새우 마늘종 볶음. 결식가정 339가구에 밑반찬으로 제공될 음식들이었다. ‘맑고 향기롭게’의 자원봉사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매주 한결같이 이곳에 모여 이날처럼 결식가정을 위한 밑반찬을 만들어 왔다. 이날 유난히 바삐 몸을 움직이고 있던 모둠장 최두리(여·47)씨는 “법정 스님이 길상사보다 우리 ‘맑고 향기롭게’ 밑반찬 조리장을 더 아끼셨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최씨는 “어른 스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려 한다”며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바쁜 손을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이날은 법정 스님 초재 다음 날이자 유언장이 공개된 지 하루밖에 안 된 날. 길상사는 여전히 법정 스님 입적 관련 일들로 분주했다.


때가 때인지라 한 주 정도는 일정을 취소할 법도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김자현(여·49)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일요일마다 승가원에서 장애아동들과 함께 요가를 하는 봉사에 참가하고 있는데 ‘시험기간에도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안 가면 내 짝이 기다린다’면서 가더라”며 “우리의 밑반찬 봉사도 하다가 쉬어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건 오히려 스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맑고 향기롭게’의 홍정근(39) 팀장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면서 갑자기 일이 많아지는 바람에 ‘당분간 일정을 취소해야 하나’, ‘밑반찬 준비를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많았다”며 “하지만 스님께서 ‘나로 인해서 다른 일에 피해를 주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평소처럼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게 스님의 뜻에 맞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한 주를 거를지 몰라 준비해 뒀던 김은 이날 특별 반찬으로 덤으로 얹혀졌다.


‘맑고 향기롭게’에서 활동하는 밑반찬 지원 자원봉사자들은 40대 초반에서 70대 초반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주부들이다. 다들 살림에는 일가견이 있어서인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모둠장 최씨는 “대부분 꾸준히 활동하신 분들이고 주부들이라 솜씨가 베테랑급”이라며 웃었다.


법정 스님이 시작한 활동인 데다 모든 일이 길상사에서 진행되지만 ‘맑고 향기롭게’의 밑반찬 자원봉사에서 종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길상사를 찾았다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다른 종교인이나 인근 주민도 적지 않다. 최씨는 “이곳 봉사자들 중에는 불교 신자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서로 개의치 않고 어울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8년 넘게 이곳에서 밑반찬 봉사를 해 온 김자현씨는 “처음에는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왔다가 ‘법문도 좋지만 남을 도우며 사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밑반찬 봉사에 참가하게 됐다”며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리장에서 막내격인 김인영(여·41)씨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우연히 이곳이 평소 책을 통해 접하고 존경해 온 법정 스님이 계신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둘째 아이 유치원만 보내면 꼭 찾아가야지’ 하고 다짐한 뒤 실제로 만 4년 동안 이곳에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에 반찬 봉지를 담아내던 다른 봉사자는 “바쁜 일이 생기면 못 오기도 하고 가끔 늦기도 하지만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다”며 “우리 같은 주부들이 부담 갖지 않으면서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라며 웃었다.


특별한 강요는 없지만 일손이 부족해 조리장 운영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한명, 두명씩 자원봉사자들이 늘어 지원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 2000년 당시 매주 금요일 밑반찬을 만들어 100가구의 결식가정에 배달했던 것이 이제는 339가구로 늘었다. 지원 대상이 늘다 보니 지난해 가을부터는 금요일뿐 아니라 목요일에도 조리장에 모여 밑반찬을 만들고 있다.


법정 스님에 대한 자원봉사자들의 존경과 사랑은 그야말로 비할 데가 없다. 다들 매주 조리장에 모여 밑반찬을 만들고 이를 결식가정에 배달하는 것이야말로 법정 스님이 남긴 정신을 이어받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법정 스님도 생전에 직접 농사 지은 감자나 옥수수를 들고 조리장을 방문하거나 자신의 저서에 자원봉사자가 보낸 편지를 소개할 정도로 밑반찬 지원 봉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봉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법정 스님이 무섭고 대쪽같이 보였을지 몰라도 우리 봉사자들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스님의 사랑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박세영기자 g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