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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 09-03-18

    알고 가면 더 좋다(1) ... 계룡산과 경복궁터 어디가 더 명당일까?

본문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터는 진정 천하명당일까?

경복궁 터에다 정궁을 잡은 정도전은 북악산과 인왕산.남산과 낙산으로 이루어지는 내사산 안에 위치해 경복궁은 명당중에 명당이라 정궁터로는 "天下第一福地"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건국시기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궁을 배치하자는 정도전에 맞서 북악산자락은 궁궐터로는 부적절하다며 반대한 무학대사는 꼭 한양을 택하겠다면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조선중기에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더 명당이라는 또다른 논란이 이어졌다.


그럼 우리는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건립한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 대하여 살펴보자

정도전 그는 주역의 대가였다. 이성계가 고려장수로 등용될 때부터 그가 나라를 세울 운을 타고났다 해서 늘 이성계를 따랐다. 또한 이성계의 꿈을 해몽해 왕에 오를 것이라고 예언한 무학대사와 더불어 이성계에게는 좌 "무학대사" 우 "정도전"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두사람 모두는 주역에 대가였고 그들의 주역풀이가 적중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다. 그런데 고려왕건의 궁궐을 개성에 잡아준 도선국사는 왕건의 아버지에게 개성에 궁궐을 잡으면 천년의 기운을 얻을 복지라고 하다가 북악산이 있는 남동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북악산과 인왕산의 기에 눌려 오백년 터라고 알려 주면서 북악의 주인은 이씨라 칭하였다.


또한 왕궁터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계룡산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이성계의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은 계룡산을 "이씨"땅이 아니라며 이성계를 꾸짖는다. 이 꿈 때문에 이성계는 계룡산을 포기하고 한양을 고집하게 되는데 나는 이 꿈에 야릇한 흥미를 가진다.


주역의 대가인 정도전이 왜 한양 땅을 고집했으며 북악산 기슭을 천하복지라 했을까?

이에 반해 무학대사는 관악산이 火山이기에 정궁인 경복궁과 마주보는 관악산으로 인해 화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반대했을까?


그리고 그는 계룡산을 왕궁터로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 정도전은 계룡산은 북방과 거리가 너무 멀고 남쪽과는 거리가 너무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옛부터 한양땅은 이씨들의 땅이라는 말들이 나돌았음을 주장하며 때문에 고려충숙왕 때 易學者 김위제는 한양땅은 이씨들의 땅이며 이씨에 의해 새로운 나라가 탄생될 것이라고 하여 윤관장군으로 하여금 한양터에다 오잇나무를 심도록 하고 매년 자라나는 순을 칼로 베어 그 기운을 다스리지 않았냐고 항변하고는 火山인 관악산의 기운을 한강물이 막아줄 것이며 강성한 火라도 한강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에 긍정적이기에 무학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한양터를 둘러보기 위해 삼각산을 오른다. 그리고 지금의 남산에까지 올라 살펴보고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소등을 타고 가든 "노인이 소에게 하는 말이 이놈 소야 너도 어찌하여 무학을 닮아 바른길을 두고 굽은 길을 가려 하느냐며 꾸짖는 것이 아닌가" 무학대사는 그 노인장이 예사롭지 않은 비범함을 느껴 다가가 넙죽 절하고 노인장 소승이 멍청한 무학입니다 궁궐터를 찾아 다니고 있으니 소승에게 좀 가르쳐 주시요.라며 청하였다. 그 말을 받은 노인이 저쪽이라며 손짓하는 곳이 바로 인왕산이 아닌가 그는 인왕산으로 올라갔다.


인왕산에서 내려다 보는 한양은 천에 복지였다. 남으로는 한강물이 막아있고 북으로는 가파른 산들이 평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천해의 요새였다. 그런데 그 산꼭대기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지 않는가 비석가까이 가서 새겨놓은 글이 "無學誤尋到此"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 글을 읽어본 무학은 깜짝 놀랜다. 道詵國師께서 6백년 후를 내다보고 무학대사가 왕궁터를 잡기 위해 이곳에 오를 것이라는 것을 예견해 기록해서 남겨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좌 청룡(북악) 우 백호(남산)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도전은 궁궐이 어찌하여 동쪽을 향하게 하려 하느냐고 반박한다. 그리하여 무학은 궁궐터 잡은 부분에서는 정도전에게 밀린다.


하지만 무학의 눈에는 정궁의 좌측(낙산)기운이 약하고 우측(인왕산)기운이 강해 장자의 기운이 약하고 차자의 기운이 강해 장자가 상속 받더라도 허약할 뿐만 아니라 화의 기운이 끊어지질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그러므로 각 궁궐마다 화를 잡을 수 있다는 해태상을 세워 화를 막고자 했었다. (그 흔적은 궁궐뿐만 아니라 한양을 둘러싼 성벽에도 나타나 있다)


이것을 예를 들어 봐도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학은 2차례의 왕자의 난에도 불구 하고 오로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곁에서 역학에 의한 국사로서 조언하지만, 삼봉 정도전은 정도전 답지않게 이성계의 京妻인 강비 소생의 어린 왕자를 밀다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 승리로 끝맺자 그에 의해 참살 당하면서 그가 펼치고자 했던 조선 건국이념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살아져 버린다.


정도전 그가 꿈꾼 조선건국이념과 계룡산에 얽힌 얘기며 그의 행적을 미루어 봤을 때 석연찮은 부분이 많고 한양은 결코 이씨들의 땅은 맞으나 火산인 관악산에 의해 쇠약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궁의 우측이 허약해 장자상속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복궁은 천하제일복지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무학대사가 도선비전에 의해 잡은 터가 궁궐로서 합당했으리라 판단된다.


그리고 무학대사 역시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지금의 자하문 위의 낮은 등선으로 인해 인왕산 기슭이 역시 "허"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그 등선에 높은 성벽을 쌓아 보완했으면 "천하제일복지" 명당일 수 있었을 것이다.


풍수지리설이라면 곽박(郭璞)이 음양오행에 맞춰 쓴 금낭경(錦囊經)이 있고 孔子는 복기택조(卜其宅兆)라 했으며 朱子 역시 인자수지(人子須知)라 하여 풍수지리의 소중함을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이 모두를 독파하고 풍수지리를 저변확대와 심충심리로 지배하게한 분이 바로 도선국사와 무학대사로 널리 알려져 온다.


한국풍수지리연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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