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련기 나는 본디 무교였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절을 몇 번 기웃거리기는 하였으나 불교 신자라고 자처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불교 관련 서적(선의 나침반, 도올의 금강경 강해 등)을 몇 권 읽어 관심이 가던 차에, 선 수련회에 참가하면 불교가 어떤 것인지 속성으로 엑기스만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선 수련회 정보를 찾아 보니, 해인사, 송광사, 대흥사, 통도사, 길상사 등에서 선 수련회를 실시한다고 되어 있었다. 알아보는 것이 조금 늦어 해인사와 송광사는 이미 마감이 되었고, 남은 절들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직장 동료 한 분이 작년에 길상사에서 실시한 선 수련회에 다녀 왔는데 참 좋았다고 강력히 추천하시고, 길상사가 서울에 있어 가기도 편한데다가 일정도 휴가에 맞추기 적당하여, 결국 길상사에서 실시하는 3차 수련회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사실 일에 치어 매일매일을 보내다가 휴가마저 힘들게 보내면 어쩌나 싶어 돈을 부쳐 놓고 나서도 갈까 말까 여러 차례 망설였으나, 이미 선 수련회에 참가하여 1,080배를 하고 오겠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해 놓았기 때문에 빠질 명분이 없었다. 직장이 천안이라 그 전날 미리 서울의 본가에 올라와 안내문에 적혀 있는 대로 티셔츠 몇 장(그런데 수련 중에는 절에서 지급하는 회색 티셔츠를 입도록 되어 있고, 셋째 날과 마지막 날에 갈아 입을 티셔츠가 한 벌씩 새로 지급되어 내가 가져간 티셔츠들은 필요가 없었다), 세면도구, 수건(수건은 안내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사실 무척 요긴했다. 나는 보통 사이즈의 세면용 수건과 손수건만한 작은 수건을 챙겨 갔는데, 작은 수건은 물에 적셔 놓았다가 절 하고 나서 땀 닦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양말 여러 켤레, 고무신을 챙겨 가지고 길상사로 갔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 탔는데 택시비는 3,000원 정도 나왔다. 길상사 앞에서 내려 절로 들어가니 차분한 나무색 건물들과 아름다운 조경이 눈에 들어왔다. 신문에서 보았던 관세음보살상은 가까이서 보니 더 아름다웠다. 아기 예수 대신 물병을 안고 있는 것 빼고는 성모마리아상과 흡사하였다. 두리번거리는데 선 수련회 참가자를 환영한다는 플래카드와 참가자는 '맑고 향기롭게' 사무실에서 접수하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어 지시대로 사무실로 가 접수를 마치고,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와 지갑을 맡기고(휴대전화를 맡기지 않은 분들도 가끔 있었는데 그 분은 스님으로부터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다), 교재와 회색 티셔츠와 승복 바지를 받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정해진 대로 설법전으로 가 정진 15번의 좌복 위에 앉았다. 설법전은 길상사 정문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총 네 줄로 좌복이 길게 놓여 있고, 각 줄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보시, 지계반은 주로 남자들이었고 인욕, 정진반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참가자들이 각자 정해진 자리에 앉자 '맑고 향기롭게'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셔서 선 수련회 오리엔테이션과 입재식 습의를 해 주셨다. 그 다음 입재식이 열렸다. 삼배도 하고 찬불가도 불렀는데 여러가지로 생소했다. 오후 두 시부터 세 시 반까지는 예불습의였다. 지산 스님께서 오셔서 예불이 어떤 것인지, 이번에 선 수련회에 참가하게 된 사람 모두가 얼마나 깊은 인연과 선업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인지 등등을 설명해 주셨다. 지산 스님은 중키에 피부가 하얗고 고우신 젊은 스님으로, 무척 말씀을 재미있게 하셔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세 시 반부터 다섯 시까지는 발우습의였다. 현장 스님께서 지도를 해 주셨다. 현장 스님은 지산 스님보다 더 젊고 키가 크시고 씩씩하신 분으로, 어떻게 보면 약간 해병대 조교같은 인상도 풍기는 분이셨다. "멘트 들어가면 절하라"든지 하는 표현을 쓰시면서 좌중을 웃기셨다. 발우공양이라는 건 말로만 들었지 발우를 만져보는 것조차 처음이라 따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발우는 서로 포개지는 네 개의 그릇과 뚜껑, 바닥에 까는 받침(이름이 뭔지 잊어버렸다), 발우 전체를 묶는 발우건, 그 위에 덮는 하얀 수건이 한 세트였다. 이걸 법도와 순서에 맞추어 차례로 펼치고 순서대로 청수와 음식을 받아 깨끗하게 먹은 후 나중에는 단무지로 싹싹 씻어 숭늉으로 헹구어 고춧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삼키고, 그 다음에 청수물로 그릇 각각을 다시 헹구어 그 물은 청수통에 붓는 것이었다. 이 때 청수통에 들어가는 물에 음식찌꺼기가 떠 있거나 물이 더러우면 그 줄 사람들이 청수물을 전부 다시 나누어 마셔야 한다고 했다. 상상만 해도 속이 미식거렸다. 사람들이 대부분 발우공양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차례 연습을 거듭해야 했다. 다섯 시부터 다섯 시 오십 분까지 쉰 후 모두 저녁 공양을 위해 설법전에 모였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발우공양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산 스님과 현장 스님께서 들어오셔서 앞에 자리잡고 앉으시고, 지산 스님의 죽비소리에 공양이 시작되었다. 지산 스님께서는 모두가 서투르다는 걸 감안하셔서 일일이 단계별로 설명을 해 주셨다. 참가자들은 역시 서툴러서 가끔 발우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순서를 틀리기도 하고 나중에 청수통에 음식찌꺼기가 남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지산 스님께서는 오늘은 첫날이니까 봐주지만 내일부터 이러면 큰일 난다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셨다. 음식은 참 맛있고 담백했다. 밥도 너무 잘 지어지고, 반찬도 양념이 강하지 않는데도 간이 딱 맞고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나중에 안 바로는 자원봉사자 여러분들께서 늘 노력해 주신다고 했다. 다 먹고 나서는 배운 대로 숭늉이 부어졌을 때 단무지를 이용해 그릇을 닦고 그 물을 마셔야 했는데, 음식 찌꺼기와 고춧가루가 약간 떠 있고 거기에 단무지의 시큼한 맛까지 더해져 이걸 마신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용케 눈 딱 감고 다 마셨다. 옆자리에 앉았던 어린 참가자는 코를 잡고 마시기도 했다. 발우공양을 마친 후 서둘러 양치질을 하고 좌복과 교재를 들고 극락전(본당)으로 이동했다. 오후 일곱 시부터 30분간 저녁예불이었다. 예불에 참석하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부처님께 삼배하고, 어느 스님께서 낭랑한 목소리로 염불을 하시다가, 때가 되자 참가자들과 일반 신도들 모두 지심귀명례를 함께 낭송하였다. 지심귀명례 또한 선수련회에서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 교재에 그 내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따라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현장 스님께서 송광사 예불의 템포가 유난히 늦은데 길상사 예불의 템포는 그보다도 더 늦다고 말씀을 해 주셨었는데, 예불에 참가하니 진짜로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자 한 자 낭송하는데 대략 10초는 걸리는 것 같았다. 귀절마다 절하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반야심경을 비교적 빠른 속도로 낭송하고 나니 예불이 끝났다. 참가자들은 바로 다시 설법전으로 이동하여 한숨 돌리고 나서 108배에 들어갔다. 선수련회에 대비하여 집에서 108배를 몇 번 연습해 보았었지만, 혼자 했던 것보다 훨씬 속도가 빨라 좇아가기가 힘들었다. 헉헉거리며 108배를 마치고 나니 눈앞은 노래지고 숨은 턱까지 차고 온몸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운동부족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세면장이 샤워하기에는 여의치 않아 수건에 물을 적셔 대강 땀을 닦아냈다. 오후 여덟 시 십 분부터는 좌선의 강의 및 참선 시간이었고, 강석 스님께서 지도를 해 주셨다. 강석 스님은 역시 마르시고 중키에 완전 에프엠으로 보이는 정통파 스님이셨다. 쓸데없는 말씀도 없으시고 표정 변화도 없으시고 조용조용한 말씨로 필요한 설명을 마치셨다. 화두는 '이 뭣꼬', 즉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였다. 유명한 화두이고 책에서 읽은 적도 있었으나 너무 잘 알려진 화두여서 오히려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반가부좌한 다리, 허벅지, 발목이 10분도 안 되어 아파오기 시작했고, 신경은 화두가 아니라 다리에 쏠렸다. 앞으로 긴긴 참선 시간 동안 어떻게 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밤 열 시가 되자 취침시간이었다. 여자들은 설법전에서 그대로 자고 남자들은 도서관 등으로 이동하여 자러 갔다. 이불 두 장과 베개를 받아 한 장을 요로 쓰고 한 장은 덮은 채 잠을 청하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서는 침대에서 낮은 베개를 베고 잤는데 바닥은 딱딱하고 베개는 높은데다가 원래 예민하여 잠자리가 바뀌면 며칠은 잠을 설치는 버릇이 있어 뒤척이기만 하고 잠은 자지 못했다. 새벽녘에 30분쯤 잠들었을까, 눈을 붙이자마자 다시 사람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어느새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이불을 개서 쌓아놓고 졸린 눈을 비비며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나서 극락전으로 이동해서 아침예불을 마치고, 다시 설법전에서 108배를 했다. 간밤에 잘 못 잔 탓인지 벌써부터 온 몸이 결리고 삐걱거렸다. 이래 가지고서 1,080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싶어 한숨만 나왔다. 다섯 시 이십 분부터 오십 분까지는 현장 스님의 지도로 독송을 했다. 교재에 있는 법구경(법정스님께서 번역하신 것)을 어떤 것은 염불하는 식으로, 어떤 것은 시낭송하는 식으로 독송했다. 현장 스님께서는 이번 3차 수련회 참가자들이 여러모로 저번 2차 참가자들에 비해 태도가 불량하다고 주의를 주셨다. 법구경은 대학시절에 현암사에서 나온 것을 읽어본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그냥 뻔한 얘기로 흘려버렸었는데, 분위기 잡아 낭송하니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아침 여섯 시부터는 아침 발우공양이었다. 전날과 같이 지산 스님과 현장 스님께서 앞에 앉으시고 공양이 시작되었다. 한 번 해 보아서 그런지 전날처럼 어렵지는 않았고, 더구나 메뉴가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야채 버섯죽이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야채며 버섯이며 살짝 들어간 참기름이며 완벽했다(이거야말로 염불보다 공양 아닌가). 죽이라 나중에 발우 닦는 것도 쉬워서 여러 모로 한시름을 놓았다. 발우공양이 끝난 후에는 잠시 휴식시간이 있어 탈의실에서 잠을 청해 보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여성 참가자들이 빽빽하게 누워 있어 여의치 않았다. 조금 후에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셔서 모두 일어나라고 주의를 주셨다. 운력 시간에는 도량 마당 쓸기를 맡아 비질을 하는데 아무래도 서투른 탓에 멀쩡하게 고르게 깔려 있는 절 앞마당을 오히려 파헤치는 형국이 되어, 결국 비질 하다 말고 낙엽 줍기로 돌아섰다. 그 다음에는 현장 스님 지도로 찬불가를 따라 부르는 상강례를 하고, 여덟 시부터 여덟 시 오십 분까지는 지산 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우리 나라 가람 배치에 관한 강의였다. 우리 나라 가람 배치의 원칙, 여러가지 상식, 각각의 불당의 의미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지산 스님께서는 불교미술을 전공하셔서 그 분야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거기에 슬라이드까지 상영하면서 설명을 해 주시니 원래대로라면 눈을 빛내며 봐야 옳았다. 워낙에 궁금했던 분야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날 날밤을 샌 악영향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강의 초반부터 정신없이 졸기 시작했다. 꾸벅 졸다 놀라 깨어 다시 슬라이드 보고, 또 꾸벅 졸다 다시 깨어 강의 듣고 하다 보니, 이 강의 내용은 토막토막으로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아홉 시부터 열 한 시 이십 분까지는 강석 스님의 지도로 다시 참선이었다. 이 때는 전날 주어진 '이 뭣꼬'라는 화두를 잡고 별도의 설명 없이 참선만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다시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에 읽은 책('영원한 대자유인')에서는 보통 사람들은 무기 아니면 번뇌에 시달린다고 했는데, 나는 참선 중 졸며 어지럽게 생각이 교차하는 꿈을 꾸었으니 이거야말로 무기와 번뇌의 혼연일체였다. 어찌나 졸린지 무릎과 다리 아픈 것도 잊을 정도였다. 20분 지나자 경행 시간이어서 힘차게 걸으며 잠을 쫓으려 했는데 다시 앉자마자 또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오전 참선시간은 화두를 잡기는커녕 잠과 싸우며 다 보내 버렸다. 점심 공양 때에는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내가 속한 정진반의 청수통에서 찌꺼기(미역잎과 참깨 몇 개)가 발견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던 지산 스님께서는 결국 청수통의 물을 정진반 모두가 나눠먹도록 했다. 맨 앞부터 한 그릇씩 퍼서 청수물을 마시는데, 속이 울렁거렸으나 많이 희석되어서인지 그렇게까지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우리 반 말고 지계반도 역시 청수물을 나누어 마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보통 군기를 잡기 위해서라도 둘쨋날 점심때쯤에는 청수물을 나눠 마시게 한다고 했다. 점심 공양 후는 사경시간이었다. 조그만 1인용 탁자를 각자 앞에 놓고 붓펜과 사경용지를 받아 반야심경을 사경하였다. 요즘 붓글씨 공부를 하고 있어서 아주 열중하여 사경하는데 한 시간 동안 반 정도밖에 못 썼다. 나중에 사경한 용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오후 두 시 10분부터 네 시까지는 다시 참선을 했다. 또다시 수마와의 싸움이었다. 졸려도 졸려도 어쩌면 이렇게 졸린지. 점심 먹고 오후 두 시 반 정도부터가 가장 졸린 시간인데 간밤에 꼬박 새었으니 그 졸림이란 참기 힘들었다. 겨우 견디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요가시간이었다. 그런데 요가시간 전 쉬는 시간에 조금 나이 드신 참가자들이 필담으로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중도하차해 버리겠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으니 나도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참선하러 왔는데 참선은 안 되고, 108배조차도 체력이 딸리는데 나중에 1080배는 어찌 할 것인가. 요가 시간에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두루 풀어 주어 컨디션은 좋아졌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더 커져 결국 현장스님을 찾아가 필담으로 사정하였다. 도무지 제대로 수련이 되지 않으니 제발 그냥 집에 가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현장스님께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시고 간절한 설득작업을 시작하셨다. 도중하차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원래 둘쨋날이 고비이고 이것만 지나면 좋아진다, 만약에 끝까지 수련을 마쳤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가서 책임을 물어라, 이런 말씀으로 흔들리는 내 마음을 굳히려 애쓰셨다. 나는 계속 망설이며 일단 저녁 발우공양, 예불, 108배까지 다 하고, 그 다음에 유서쓰기에 들어갔다. 유서 쓰기 직전까지만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짐 들고 나가면 버스나 택시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유서를 쓸 무렵에는 힘든 하루 이제 다 보냈는데 하루만 더 버텨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유서는 서너 번 써 보았기 때문에 익숙하게 잘 썼다. 지산 스님께서 "아들아, 장농 밑에 숨겨둔 통장 찾아서 꺼내 써라" 류의 유서는 쓰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썼다.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참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 당장 죽어도 별로 여한이 남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인데, 이렇게 인생이 즐겁고 만족스럽다는 것은 결국 대자대비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글쎄. 이날 밤 참선은 50분으로 짧았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않게 무사히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둘째 날 밤은 무사히 푹 잤다. 셋째 날은 간밤에 잘 잔 덕분인지 몸이 가벼워서 아침예불도 가뿐하게 하고 108배도 비교적 수월하게 했다. 이 날도 역시 법구경을 낭송하는 것으로 독송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맛있게 아침발우공양을 했다. 식후 운력은 설법전 청소였는데, 비교적 신속하게 마치고 나서 설법전 창틀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이날 하루는 계속 이렇게 틈틈이 눈을 붙인 덕분에 참선 시간에 졸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상강례에 이어 주지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주지스님이신 덕조스님께서는 머리가 반짝반짝하시고 역시 젊어 보이는 스님으로, 말씀을 무척 재미있게 하셔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 다음 9시부터 10시 30분까지의 참선시간에는 처음으로 제대로 참선이 되었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잡은 채 적어도 졸지 않고 생각이 자꾸 다른 데로 흘러도 필사적으로 제자리로 놓으려고 애쓰며 여러 가지로 떠오르는 의문들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10시 30분부터 11시 20분까지는 지산 스님의 사찰 안내였다. 길상사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가, 무슨 건물이 있는가로 시작된 안내는 어느새 여러 참가자들의 질문으로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를테면 스님들의 가사장삼이 왜 여러 조각인지, 왜 '밭전'자 모양을 하고 있는지, 짧은 장삼은 왜 안 입으시는지, 그밖에 여러 가지 불교의 기본적인 것에 대한 질문들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점점 열띠게 변했다. 지산 스님께서는 바삐 대답하시다가 시간을 보고 간략하게 사찰 투어를 이끄셨다. 대원각을 경영하던 길상화 보살님이 대원각을 기증하신 덕분에 서울 시내에 이렇게 좋은 도량이 있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스님들이 머무시는 독채들, 침묵의 집, 길상선원 등을 두루 보여 주셨다. 오전의 맑은 공기 속에서 사찰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이제 많이 없어졌다. 점심 발우공양을 하고(역시 맛있었다. 어떻게 모든 음식이 이리도 맛있는지.) 자유정진 시간에 새벽과 같은 요령으로 설법전 창틀에 등을 기대고 또 눈을 붙인 후 한 시부터 두 시까지 주지스님의 다도 강의를 들었다. 주지스님께서는 정말로 차를 좋아하시는지 눈을 빛내시며 차에 관해 설명하시는데 원래는 석 달짜리 강의를 한 시간에 맛뵈기로 하는 것이라시며 서둘러 이것저것 필요한 말씀을 쏟아내셨다. 선물로 받으신 싸구려 중국차 깡통을 흔드시며 절대로 이런 거 남한테 선물로 주지 말라는 말씀도 하시고(아무리 싸구려라도 무조건 극상품이라고 써 있다고 함), 보이차 덩어리를 꺼내 구경시키기도 하시고, 좋은 다기란 어떤 것인가 설명도 해 주셨다(입술이 얇아야 좋은 찻잔이라고 하셨다). 다섯 명당 하나씩 5인분 다기세트가 배정되어 냉차를 우려내어 마셨는데 참으로 맛이 좋았다. 그리고 차를 마시니 역시 정신이 맑아졌다. 덕분에 오후 두 시부터 네 시까지의 오후 참선은 비교적 맑은 정신으로 졸지 않고 해 냈다. 그런데 졸음이 오지 않는 대신 이번에는 무릎과 발목이 아팠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왼쪽 어깻죽지도 빠질 듯이 아파왔다. 계속 아프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그쪽으로만 가 화두는 잡을 엄두도 못 내고 계속 무릎과 발목과 어깨 생각만 났다. 스스로 무척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히려 경행할 때 화두가 조금 잡히는 것 같았다. 네 시 10분부터 다섯 시까지는 다시 요가시간이었다. 참선하느라 뻣뻣하게 굳은 다리와 발목이 완전히 풀렸다. 모두들 흐뭇한 표정으로 팔다리를 쭉쭉 펴며 참선의 피로를 날려보냈다. 그 후 세면 및 세탁 시간에 다시 한 숨 돌리고, 또 맛있는 저녁공양을 하고, 저녁 예불까지 마쳤다. 이제 108배를 해야 하나 보다 싶었는데 그날 밤 1080배를 할 거니까 108배는 생략이라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크게 한시름을 놓으며 조금 쉬었다. 여덟 시부터는 한 시간 동안 작은 음악회였다. 지석용씨라는 분이 오카리나 연주를 해 주셨다. 참가자들은 모두 극락전 앞에 펼쳐진 돗자리 위에 앉아 달빛과 촛불빛에 의지하여 오카리나 연주를 감상했다. 지석용씨는 오카리나를 보여 주며 뭔가 연상되지 않냐고 물으셨는데, 나중에 다른 참가자들과 얘기한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지스님의 헤어스타일을 연상했다고 한다(나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오카리나 소리는 무척 정겹고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배워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연주회는 원래 예정보다 조금 길게 한 시간 반 정도 진행되었고, 그 후에는 그 옆의 테이블에 마련된 수박과 떡을 나눠 먹었다. 주지스님께서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나 떡이 정말로 맛있어서 나는 다섯 개나 먹어치웠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참선이었다. 원래는 설법전 안에서 하게 되어 있었으나 주지스님께서 야외참선을 하자는 안을 즉석에서 내셨다. 돗자리가 추가로 깔리고 모두 좌복을 가지고 나와 자리를 잡았다. 야외참선은 정말로 색다른 체험이었다. 여름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풀벌레들이 우는 가운데 참선하니 방 안에서 참선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다리가 무척 아파왔다. 앉아 있는 자리가 평평하지 않고 경사지고 울퉁불퉁하여 어떻게 앉아도 도무지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참선이라는 생각에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정신집중을 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자 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여기저기서 "따닥 따다닥 따닥"하는 죽비소리가 들려왔다. 죽비소리를 들을 때마다 졸음에서 깨어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참선했다. 영원히 가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가고 마침내 1시가 되자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뻐근했다. 이제 1080배를 할 차례였다. 1080배는 총 세 시간으로 나눠 행해지는데, 첫 시간 지도는 현장 스님께서 맡으셨다. 현장 스님께서는 몸에 문제가 있어 따라 하지 못할 사람들은 뒷쪽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나는 갈까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이왕 할 거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에 그냥 앞에 남았다. 참가자들은 현장 스님의 죽비소리에 맞추어 1배씩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죽비소리가 무척 빨라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었다. 108배를 넘어가자 점점 박자가 맞지 않고, 숨이 턱에까지 차고, 눈앞이 아득해지고, 무릎이 빠지는 듯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악으로 계속하여 그럭저럭 첫 시간을 마쳤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복도로 나와서 물과 소금을 먹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둘째 시간은 지산 스님께서 지도하셨다. 지산 스님의 죽비 템포는 현장 스님보다 조금 느려 처음 20분 정도는 크게 무리 없이 따라했으나 20분이 넘어가자 다시 못 따라할 정도로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내가 자꾸 뒤처지는 것을 본 현장 스님께서는 내 앞으로 와 독려하기도 하시고, 뒤처지는 다른 참가자 앞에서 독려하기도 하시며 쉬지 않으셨다. 이때부터는 정말로 정신 없이 몸이 가는 대로 죽비 두세 번에 절 한 번을 겨우겨우 했다. 내 자리가 비교적 앞이어서 앞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면 뒷쪽 참가자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뒤로 가겠다고 했으나 현장 스님께서 말리셨다. 셋째 시간은 강석 스님이 맡으셨다. 강석 스님의 죽비 템포는 현장 스님만큼 빠른데다가 마지막 시간이어서 이제 나는 아무 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몸이 허락하는 속도로 절했다. 한 번 일어나고 앉을 때마다 무릎이 깨질 것 같았다. 마지막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지났는지 제대로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엎드린 채 소망을 기원하는데 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 합쳐 보니 대략 500배 정도를 한 것 같았다. 기진맥진한 채로 다시 소금 먹고 물 마시고 물수건을 만들어 몸의 땀을 닦고 한 숨 돌리고 나서 아침 예불 하러 갔다. 1080배보다 아침 예불이 더 고통스러웠다. 무릎이 깨질 것처럼 아파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절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무릎 꿇고 앉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1080배를 무사히 마쳤다는 개운함에 기분은 상쾌했다. 아침 발우공양을 마치고 여자 참가자들과 함께 발우를 닦은 후, 주지스님, 지산 스님, 현장 스님, 강석 스님, 그리고 다른 스님 두 분과 함께 차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는 수계식 습의를 거쳐 수계식이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오계를 지키겠다고 서약하고 팔을 향으로 지지고 법명을 받았다. 내 법명은 삼묵(三默)이었다. 회향식(폐회식같은 것)을 마치고 수련소감문을 적어내고 나니 모든 수련이 끝났다. 아주 힘든 일정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뜻깊었다. 이제 왜 참가했나 하는 후회는 들지 않았다. 참선을 제대로 못 한 게 아쉽기는 했어도 불교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배웠고, 특히 스님들이 성실히 수행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 반의 반이나마 따라해 본 것이 여러 모로 유익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참가자 뒷바라지를 해 주시던 여러 자원봉사자 분들에게도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 잘 닦자고 수련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자원봉사라니. 스님들, 자원봉사자님들,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