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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11-30

    하늘 향기로 남은 무소유 -이주향 (동아일보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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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이주향] 하늘 향기로 남은 무소유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는 뉴스를 듣는데 후끈한 것이 가슴에서 눈으로 올라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릿해지면서 쿵쾅쿵쾅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5년 전 길상사에서 우연히 만나 ‘법구경’ 한 권 받은 게 전부였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도 놀랐다. 그 돌연함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뉴스로, 다큐로 도배를 했으니 법정 스님이 스님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친구도 전화를 하면서 스님 얘기를 한다. “그런데 말이야, 도 닦는 사람이 무슨 폐암이라니?” 까칠한 질문이지만 어리바리한 점이 매력인 친구이고 보면 솔직한 물음이기도 하다.


“병이 사람 가려 찾아오니? 병이 두렵고 무서워 병에 사로잡히면 소인이고, 병고로 양약을 삼을 수 있으면 군자고, 도인이지.” 나는 오히려 병을 껴안고 스러져 가신 것이 스님 같다고 생각했다. 암까지도 친구 삼고 마침내 친구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죽음의 터를 닦은 스님의 마지막이 스님다웠다고. 스님에 대한 다큐를 보니 병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보인다. “밤이 두려웠어요. 기침 때문에 일어나니까…. 이제는 기침이 고마워. 밤의 고요를 즐길 수 있게 하니까. 나중엔 죽음까지 담담히 받아들이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구나, 스님에게 병은 죽음까지 받아들이게 하는 몽학선생이었구나! 스님이 말했다. 행복할 때 행복에 매달리지도 말고, 불행할 때 불행을 피하려고도 말고 그저 순간순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고. 그 말씀대로 스님은 폐암에 걸려 거동도 불편해진 몸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면서 친구를 기다리듯 몸 벗을 날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을까. 그 아름다운 마무리가 공명하여 유언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이 반응했는지도.


시간 공간도 버린 구도자의 뒷모습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평생 무소유의 울타리에서 고독과 벗하고 청빈과 벗하며 단순하고 질박하게 살아온 수행자가 허물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에게 빚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아는 자의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자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생사를 넘어 따라오는 것은 돈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선업이든 악업이든 자신의 허물뿐임을 아는 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은 개체가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이면서, 그저 장수가 목적이어서 지지부진한 생에 아부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를 싸늘하게 버리고 가는 감성형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버림을 당할 뿐, 시간과 공간을 홀가분하게 버리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까 수많은 이들이 법정이라는 이름 앞에서 애도하고 기도하고 염불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들은 스님에게서 하늘을 본 것이었다. 스님은 우리 속의 하늘을 일깨우고 가신 것이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이 시간과 공간, 그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난 자리에 하늘의 향기가 남아 있다.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이 기원한다. 돈 냄새 나는 부자이기보다 품이 넓은 어머니였으면 한다고. 명령하는 권력자나 명령받는 하인이기보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로맨티시스트이고자 한다고.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억울하니 출세해야겠다고 바동대는 소시민이기보다 나무를 심을 줄 아는 자연주의자였으면 한다고. 여기저기 친구가 많은 공사다망한 사교가도 나쁘지 않겠지만 침묵의 힘과 고독의 맛을 아는 구도자였으면 한다고.


‘나는 누구인가’ 공명하는 물음


그런데 하늘 향기를 남기고 스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김수환 추기경에서부터 하나둘 이 시대의 축복이라 해도 좋은 어른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속에 하나의 믿음 같은 것이 자리 잡았다. 결국은 죽는데 우리는 왜 살까? 봄날은 가는데, 꿈처럼 물거품처럼 덧없이 지나가는데! 삶에 대한 이 질긴 애착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스님에게 삼배를 드리면서 나는 스님의 “나는 누구인가?”에 공명한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를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물음인 동시에 해답인 저 물음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스스로 선언한다. 나는 돈이 아니다. 나는 욕심이 아니다. 나는 집착이 아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아니다. 차라리 나는 눈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관찰하는 눈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