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법정 스님
어느 날, 도선사 접견실에 세 분의 젊은 시인이 찾아왔다. 그들에게 나는 “시(詩)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다분히 선적(禪的)인 질문이었다. 그래도 장래가 촉망받는 시인으로 알려진 그들에게 스님이 대뜸 그런 질문을 던졌으니 적지 않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란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자이니 절에 있는 모든 전각과 바람소리, 물소리, 범종 소리 심지어 스님의 법문조차 시 아닌 게 없다. 그러니 나 역시 시인이 아닌가?”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제야 젊은 시인들은 환하게 웃으며 “역시 우리 스님”하고 고개를 이내 끄덕였다.
우리는 11일, 스님이자 문필가로 세상에 향기로운 ‘무소유’의 법문을 던졌던 법정 스님을 잃고 말았다. 입적 직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 구현’에 쓰라고 하시고 마지막에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가셨다.
스님께서 대중적으로 그렇게 많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비단 ‘무소유’ 뿐만이 아니라 스님의 온화한 성품(性品)과 시와 같이 가슴을 울리는 문장의 힘 때문이다. 간결하면서도 자연 속에서 품어 나오는 군더더기 없는 글들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시처럼 은은하고 불교의 정수(精髓)를 그대로 문장 속에 녹아 흐르게 하는 산문들은 불교가 왜 우리 곁에 있는가를 그대로 가르쳐 준다.
스님께서 집필을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은 불교 포교에 대한 각별한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빨래판’으로 보았던 한 할머니를 보고 충격과 깨달음을 동시에 얻게 된 스님은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사상을 바로 전하고 불교를 제대로 포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무소유’란 책이며 수많은 저서들이다. 말하자면 불교 포교에 대한 소신 때문이었다.
스님은 생전에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고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고 수행자의 삶을 강조하셨다.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사람은 반드시 나서 죽는다. 내가 살 만큼 살다가 목숨이 다해 이 몸이 내 것이 아닌 게 될 때 불태워 버리면 일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며 생사(生死)를 초월하셨다.
이와 같이 출가란 바로 ‘소유’를 버리고 떠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 위해 스님은 그토록 한 편의 시와 같은 삶을 소망했으며 그렇게 사시다가 떠나셨다. 지금 도선사에는 스님의 산골(散骨)같은 봄비가 내리고 있다. 시처럼 살아오신 스님의 ‘무소유’의 정신이 이곳에도 남아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도선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