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후원하기 나의후원

보도

    • 10-03-17

    무소유를 남기고 가신 법정스님 -이일주 (뉴스천지 3.17)-

본문

[교육칼럼]무소유를 남기고 가신 법정스님

이일주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유아교육과 교수


2010년 03월 17일 (수) 16:09:47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불교계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던 법정스님이 지난 11일 입적하셨다.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누구나 세상을 떠나면 관에라도 모시지만 법정스님은 그 또한 소유라고 보셨는지 한 겹 가사(袈裟)만을 덮고 연화대에 올라 홀연히 떠나셨다. 사회의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이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곳에 차리는 빈소는 말할 것도 없고, 영결식조차 없이 떠나시는 큰 스님을 보내드리는 서운함과 아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범인(凡人)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귀한 글귀가 화려한 만장 한 장 없고, 어떤 형식을 갖춘 추모 행사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엄숙하면서도 조용한 가운데 나름대로 법정스님이 남기신 교훈을 되새기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법정스님의 많은 저서 속에 담긴 글귀는 겉으로 보아서 안다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법어(法語)의 의미를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가졌던 분들의 말을 통해 보면 스님은 가진 것을 모두 남에게 주지만 무엇을 누구에게 주었는지조차 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실천을 통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자비(慈悲)를 베푸신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오랜 기간 법정스님의 지인이었던 어느 수녀님께서 스님에게 ‘공양주세요’ 하면 ‘성찬을 드시자’고 하셨다는 말씀 속에 서로 다른 종교를 향한 열린 마음과 포용하는 정신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통섭(通涉)이라는 시대정신과 상통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법정스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진리는 ‘무소유’일 것이다. 보통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할수록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집착하게 되어 결국은 소유의 굴레에 갇혀 살게 된다는 섭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본다. 결국 무소유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찾도록 깨우쳐 주는 교훈일 것이다.


이와 같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자비’, 그리고 ‘통섭’의 교훈을 통해서 오늘날 부모들이 지녀야 할 자녀교육관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자녀를 보는 시각이 교육관을 결정짓게 마련인데, ‘내 아이 내 마음대로 기른다’는 말이 있듯이 아직도 자녀는 부모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요즈음에는 한두 자녀만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먹고, 입고, 행동해야만 마음이 놓인다는 부모도 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자녀는 소중한 독립된 인격체이지, 부모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부모도 그를 낳은 부모의 소유가 아닌 이치와도 같다. 다만 부모는 고귀한 한 인격체인 자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고(자비), 자녀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통섭) 애착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자녀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선한 인간의 특성이 바르게 발달하기 시작한다. 자연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것과도 같이 자녀들에게도 부모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할 때 적절히 제공되어야 한다.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진리를 통해 보면 자녀교육에 있어서의 무소유란 자녀를 두지 않는다거나 자녀를 방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두되 ‘부모 말 잘 듣는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하는 식으로 불필요하게 자녀를 부모의 뜻에 따라 자라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에서 끝없는 자비심을 지닌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용, 정직함과 친밀함을 배워 많은 사람들과 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지혜를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법정스님이 남기고 가신 무소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반추(反芻)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