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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11-30

    법정스님을 보내며..-김선우 시인- (세계일보 3.11)

본문

법정 스님을 보내며…

‘무소유’가 곁에 있음에 감사 이땅에, 부디, 다시 오시길…

흰 눈 덮인 낮은 한옥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볍게 덮였구나.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붕의 살갗처럼 눈이 희구나.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삼월에 내린 눈 위로 ‘봄 햇살’이라고 할, 꼭 그런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아침부터 내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려는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부를 넣었다. 건널목 조심스레 건너다니고, 차도 쪽에 붙어 걷지 말고, 밥은 항상 맛있게 먹고…. 자주 안 하는 잔소리를 하게 된 날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지붕들이 어제보다 조금 가벼워져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나. 햇살에 몸이 닿으며 아지랑이처럼 화하는 눈의 입자들이 허공을 촉촉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나. 법정 스님 입적, 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왔다. 내가 참 좋아하는 수녀님이 보낸 메시지였다. 햇살이, 흰 눈을, 건너고 있다. 중얼거리면서 티브이를 틀었다. 화면 하단에 자막으로 속보가 지나간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을 때에도 해맑은 햇살 같은 수녀님의 문자 메시지를 받은 후 티브이를 켜 속보를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왕생기원, 이라고 메시지를 보낸 후, 백팔 배를 올렸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가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들. 수녀님과 내가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나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연 것도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무소유’는 문고판의 얇은 책이었는데 수녀님이 들고 있는 책은 판형이 달라진 양장본이었다. ‘무소유’가 세상에 나온 지 퍽 오래되었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오랜 시간을 통과해 여러 세대의 사람들 속에 무소유의 향기를 퍼뜨리고 있는 아름다운 책이 고마웠다. 내가 고등학교 때 ‘무소유’를 나에게 권해준 둘째언니는 내가 일기장에 ‘무소유’에 대한 독후감 쓰기를 마친 무렵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기억하지만, 정작 스님께선 한 말씀 하실 것이다. 그 책은 법정의 소유가 아닌데 어찌 법정의 ‘무소유’냐고. 무소유는 불가의 오랜 수행의 원칙이며 수행자 삶의 중요한 실천 양식이니, 법정의 ‘무소유’ 같은 건 실은 없다! 라고. 그 ‘없음’을 우리 곁에 자상하게 풀어 보여준 아름다운 책 ‘무소유’에 감사드린다. 너무 멀리 있는 경전이 아니라 지하철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공원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리 곳곳 무람없이 펼쳐 한 구절을 짚어갈 수 있는, 무소유가 경전의 엄숙한 얼굴이 아니라 살가운 문학의 형태로 우리 곁에 있는 것에 감사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들뛰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덜 소유하려고 하는, 심지어 터럭 하나조차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자 하는 정신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맑은 바람줄기처럼 함께 있어 이 물신의 사회가 여태 아주 끝장나지는 않고 버텨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운하와 4대강 사업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안타까워하시던 법정 스님. “수많은 생명이 어울려 살아가는 방방곡곡 이 땅이 근래에 와서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성찰을 잊은 개발에 의해 온 땅이 피 흘리고 신음하고 있다”며 가슴 아파하던 스님을 떠올린다. 마지막 병상에서 강원도 눈 쌓인 오두막으로 오고 싶어 하셨다는 전갈을 들으며, 내 눈길 가닿는 강원도 곳곳의 오두막들이 촛불 한 자루씩 밝히는 것을 보고 있다.


왕생기원. 온 산하가 인간의 이기심으로 신음하고 소유의 탐심이 무소유의 청정을 너무도 쉽게 유린하는 이 땅으로 다시 오시길 기원하는 일이 부덕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나는 우리 곁을 떠나는 아름다운 스승들에게 아직도 ‘천국’이나 ‘극락’에 안거하시길 기원할 마음이 없다. 이 땅에, 부디, 다시 오시길. 세상 중생의 고통이 사무쳐 혼자만 극락에 안거할 수 없는 자비의 마음이 보살의 연원이라 하였으니, 지금 이 순간부터, 이미 돌아오기 시작한 당신을 맞으러 봄 햇살, 봄꽃, 봄바다, 봄강물 보러 가야겠다.

기사입력 2010.03.11 (목) 23:07, 최종수정 2010.03.12 (금)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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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