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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07-08-28

    2007년 8월-<라데팡스의 불빛>

본문

<라데팡스의 불빛>


지난 8월 24일(금) 저희 부산모임에서는 독서모임의 신입회원님이 참여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그 기다림이 한달 더 연장되어야 해서 아쉬웠지만, 어느때와 다름없이 유재경, 김순덕회원님과 사무국 직원들이 단란하게 모여 맹난자 선생님의 수필집을 함께 이야기하였습니다.


-유재경 회원님-


맹난자님은 불교언론을 통해서 약간 알고 있는 분이었다.

책을 처음 대하는 순간 중년의 불교신자이며 수필가인 작가의 이미지는 불심이 깊고 연세가 있으신만큼(반쯤 회향의 시점에 와 있다고 할까) 삶에 대한 감사와 후배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내용들이 담겨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누구나 어릴 적 상처는 오래가는 것일까. 어릴 적 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병고, 아버지의 외도 등으로 받은 상처 때문인지 어두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어쩜 어릴 적 상처 때문에 문학적 소양도 깊어진 것인지 그런 때문인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 화가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느낀 여행기들을 많이 실어 놓았다.

한편으론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인 만큼 우리나라와 세계의 문인, 화가들을 소개하고 직접 경험한 내용들은 친근감을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본작가들은 생소했다. 또한 그 나이에 갖기 어려운 투우라든가 성에 대한 감정 등을 솔직히 표현한 것을 보면 나이를 뛰어넘어 작가의 관심사가 다양한 것인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그만큼 교육받고 문학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하고 소양이 비슷한 남편과 주제를 갖고 세계여행을 하신 분으로 책에 표현이 안된 것인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만족과 감사의 내용이 부족해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김순덕 회원님-


네모난 창안에 푸른 산과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나뭇잎이 신선한 풀내음이 코끝에 맴돌며 나를 오라 유혹하고 하늘의 흰구름도 놀거니 가거니 쉬엄쉬엄 거닐며 친구하자 하는 8월의 어느 날 오후., 맹난자의 <라데팡스의 불빛>, 책 읽은 소감을 옮기려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게임장의 두더지처럼 삐죽이 올라오는 정돈되지 않은 느낌들을 어쩌지 못하고 눈앞의 광경을 몇 자 서두에 올려본다.

전반적인 책의 줄거리가 저자의 지난 시절의 아픔과 함께 많이 어둡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중에 노년의 그림이 이런 느낌들일까.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부정하고 있었다.

이름이 익은 예술가들의 가슴 아픈 죽음들을 대면하는 것도 새로운 것이었지만 그 영광(?)도 잠시 저자가 그들의 죽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묘지기행까지 하지 않았던가. 한자에 밝지 않아 옥편을 옆에 두고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괜시리 짜증으로 올라오는 마음을 보고 한참동안 내 안의 문제를 더듬어 보기도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처럼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터는 시간을 죽여야 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라는 구절에 나는 한참동안 눈을 두고 있었다.

시간을 죽여야 하다니 나의 애고가 발동하며 하는 말. 배울만큼 배우셨고 20대부터 불법을 공부한 분이 시간을 죽여야 하다니...하며 나는 저자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아직 젊어서인가... 죽음에서 엿본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덧없음. 돌이켜 보면 죽음이 있어 우린 그나마 겸손할 수 있고 생을 바라보는 눈도 더 깊어질 수 있지 않은가.

맹난자 님이 다지선생께 보낸 글에서 인생이란 도로(徒勞)라고 염라대왕에게 대답할 참이라던 글귀가 책을 놓은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맹선생님 덕분에 20대에 선물받고 너무 난해하며 읽지 못한 칼 융의 자서전과 올 여름을 같이 하게 됨을 감사드린다.


-김윤정 과장-


맹난자 선생님의 작가적 고집스러움(?)과 자존심이 매우 높음을 문득문득 펼쳐보게 되는 사진 속의 먼 느낌으로, 그리고 삶의 치열한 고통들을 추상화한 문체 속에서 느끼게 된다.

작가 스스로도 삶을 ‘그대로 놓고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고 고백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요즘처럼 무더웠던 여름방학 다락방에 틀어박혀 읽었던 <고도를 기다리며>가 미처 소화되지 못해 늦체한 채로 내게 남아있었는데, 맹난자 선생님의 <라데팡스의 불빛>가 그 어떤 해설서나 작품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소화제가 되어 주었다. 그 인연 감사드린다.

오스카 와일드의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聖地)가 있다.’ 는 구절이 이 <라데팡스의 불빛>를 응축하는 한 구절이 아닐까 한다.

슬픔으로 빚어낸 성서 <라데팡스의 불빛>을 덮으며 고개 숙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나이가 되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이미 살아오신 삶의 무게와 더불어 작가 당신은 헛된 노고였다고 말하지만 힘겨웠던 노고에 대한 경배이다.

수필이란 글쓰기 자체가 갖는 곤혹스러움, 고통은 소설쓰기의 고통과 곤혹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고 여긴다.

결코 붓가는 대로 쓰여질 수 없는, 쓰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 어쩌면 수필인지도 모른다.

농축되고 발효되어 우러난 진액만을 국자로 톡톡 떠올려서 거르고 걸러낸 맑은 원액이 바로 수필이어야 할것이다.

그 ‘무거운 짧음’ 속에서도 벌거벗은 듯 희․노․애․락이 드러내 놓여지며 서로 점철될 때 글을 읽는 이와 글, 글쓴 이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고, 작품의 가장 온전한 감상자인 작가자신도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저자 맹난자 선생님은 이 책을 발간하신 후에 어떠셨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개운함, 홀가분함, 미묘한 서운함의 감정들을 혹시 느끼셨을까. 실로 그러셨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 다음 산문집을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강희정 간사-


한 개인의 생활과 생각들이 잘 담겨있는 수필집을 읽은 것이 참 오랜만인거 같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 읽었던 수필집들 중에 기억속에 남아 있는 것도 그다지 없는 거 같다. 아마 이 책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언제 읽었긴 하지만 기억속엔 별로 남아 있지 않는.. 지금 이후로 다시 들춰보지 않을 것 같은. 책 처음부분엔 참 많이 울었다.

작가의 아픔들과 또 그 아픔들을 견디어 내는 과정들이 참 가슴 아팠다. 그리고는 페이지가 넘어 갈수록 계속되는 우울함과 어두운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은 나는 아직도 영화나 책이나 이야기들이 해피엔딩이 좋고 권선징악을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생각이 참 어리기만 하고 편협한 틀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