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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08-03-20

    2008년 1월-<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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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독서모임


2008년을 맞이하여 첫모임인 1월은 한승원 작가님의 장편소설 <추사>를 읽고 25일 오후 4시 부산모임의 새 사무실에 다함께 모였습니다. 저희 부산모임에서는 2008년부터 매월 선정도서에 더해 참가자 각자의 추천도서를 보태어 읽기로 하였습니다. 첫시작인 올 한 해 동안은 제가(김윤정 과장), 그 다음해부터는 참가자들이 매월 번갈아가며 책을 추천합니다.


1월에 어른스님의 추천도서인 <추사>와 함께 읽을 책으로 신영복 교수님의 <나무야 나무야>를 읽고 책에 실린 것처럼 '각자의 당신'에게 '각자의 장소'에서 쓴 편지를 적어오는 숙제를 나누어가졌습니다. <추사>의 소감과 <나무야 나무야>의 개인편지를 차례대로 싣습니다.


-<추사> 소감-


김순덕 회원님


유교집안의 양반의 종손으로 태어나 학문을 익히고 수 천권의 책을 읽고 성장하여 중국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추사의 날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리하여 원교 이광사를 깨부수려 했고 내 생각이 옳다는 마음에 백파스님과 해붕스님을 대적하였지만 10년이 넘는 고통스런 유배생활과 시서화에 몰두하여 우주의 공한 도리와 불교의 불이를 깨닫게 되는 추사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성공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했다.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 이 바로 그 부류이다.


작가가 추사를 초반부에는 난사람, 든사람으로 묘사하다가 나중엔 된사람으로 급기야는 깨달은 사람으로 전개해감을 보면서 난사람, 든사람은 많아도 된사람 구하기 아쉬운 이 시대를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나 하나의 문제라면 상관없겠지만 한 나라의 CEO나 그 stap들이라면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200년 전후의 추사의 삶을 보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고 지금의 나도 그들처럼 흔적없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일체의 무상함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강희정 간사


추사 김정희의 글씨나 그림들에서 저게 왜 그렇게 가치있다고 평가될까 하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나는 그 뜻을 참 잘 모르겠는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추가 선생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리고 천재로 태어나서 그림이나 글씨 등이 그냥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렇게 막연하게만 유명한 우리 선조 중에 한 사람인가보다 생각했는데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추사를 읽고 다시 한 번 추사선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치열하게 책을 읽고 생각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을 하면서 노력하고 노력하며 이루어낸 결과물이란 것을. 어느 하나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추사선생이 당시 좀 더 그 뜻을 펼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오직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백성도, 도덕도, 심지어 자기의 동지까지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지도자들, 정치인들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말로는 뻔질나게 국민을 위한다지만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다.


김윤정 과장


한승원 선생님의 장편소설 <추사>를 읽는 내내 나는 그의 삶에서 주를 이루는 지란지교가 부러웠다. 첫만남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가슴을 열고 만나 서로에게 평생 그립고 반가운 벗이 되는 그 지음(知音)의 인연들!


뿐만 아니라 역경과 고난 속에서 주저앉지 않고 호연지기를 키워내는 추사 선생의 높고 맑은 정신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 젊은 날의 호기가 나이듬에 따라 자연과 삶의 순리를 따르는 모습에서 천재 예술인 김정희가 한 사람의 김정희로 완성되고 변모되어 가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소설 <추사>를 읽으면서 퍽 마음에 들었던 것은 추사 연보에 단 한 줄도 언급된 바 없는 '초생'의 등장이다. 그리고 그 등장이 단순한 배경인물이 아닌 추사에게 직접적이고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묘사된 것에 아주 흡족했다.


전기가 아닌 소설로서의 매력과 장점을 흠씬 살려내신 것이리라. 한 인물의 삶에 그의 가족, 부모, 아내와 자식, 그리고 정신적 반려자가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헤아리신 작가적 역량과 삶의 연륜에 박수를 보낸다.


한승원 선생의 장편소설 <추사>를 읽기 전에 수필집 <이 세상 다녀가는 것 중에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등을 접하면서 선생님의 맑은 삶, 향기로운 작품세계를 좋아했고 따님인 한 강 작가까지도 좋아하던 차에 한작가님의 장편소설을 읽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우리에게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유명하신 작가님이시지만, 일흔의 나이를 앞두고 장편소설을 쓰신 작가님께 경이와 찬사를 보낸다. 한작가님이 계신 해산토굴을 헤아리며 건강을 기원해본다.



-<나무야 나무야>를 읽고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당신에게 쓴 편지-



"장산에서"


김순덕


마음이 편안할 때보다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 그리고 기분이 우울할 때, 내가 더더욱 발길을 옮기는 이 곳 장산 언저리, 그럴 때면 장산의 식구들은 언제나 반갑게 나를 대해주면 쉬었다 가라고 했지.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고귀한 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그리고 내가 이사를 하면서 장산의 친구들을 대면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지.


언제간가 내가 네게 왜 이렇게 좋은 산을 가까이 두고도 자주 가지 않느냐고 투박했을 때, 너는 빙그레 웃으며 너무 자주 가면 장산이 닳을까봐 그런다고 했었지.


그때 나는 속으로 너의 게으름과 무리지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너의 성격을 비웃었지.


그러면서 나는 정토회에 소속되었고 너와의 만남은 점점 멀어졌지.


하루하루 부처님 법을 알아가는 재미가 나에겐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스님의 명쾌한 법문을 들으면서 한 번씩 너를 떠올렸지.


늘 남편 때문에 속 끓이는 네가 이 법문을 듣고 해탈하기를 바란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니 초보수행자의 자만심도 섞여 있었지.


하루는 나의 권유에 딸을 데리고 법문을 들으러 왔었지.


그런데 너는 경외심에 불타있는 나와 대조적으로 법문에 아무런 흥미도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갔었지.


인연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다 했지만 그 때도 나는 저러니 늘 저 고생이지 하며 너를 이해하기보다 네 티끌 찾기가 바빴지.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았지만 이렇게 문자로 옮겨놓고 보니 내 잘못이 한 두 가지가 아니구나.


속 태우는 남편과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는 너를 이 곳 장산 중턱 나만의 장소에서 해운대 신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생각건대, 진정한 보살은 바로 너라는 것.




"친구야, 안녕"


강희정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까 참 이상하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싶다.


친구야, 우리가 항상 같이 갔던 경주에 대한 기억으로 편지를 쓸려고 해, 그 중에서 우리가 여러 번 가면서 제일 편안하고 좋았던 기억은 황룡사터에 갔을 때와 안압지에 갔을 때였던 것 같아.


화창하게 맑게 갠 날은 맑은 기운 그대로, 또 어슴프레 스산한 날은 또 그대로의 분위기 대로.


안압지에서 아름다운 밤 풍경 속에서 느꼈던 편안함 때문에 경주하면 이제는 보문단지나 불국사보다 황룡사터와 안압지가 먼저 떠올라서 경주가 참 좋아. 그래서 경주에 자꾸 가고 싶어지는 거 같아. 날이 좀 더 따뜻해지고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이 오면 우리 경주에 또 한 번 가자.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이란 말은 니가 자주 하던 말인데. 오늘은 내가 했네.


황룡사절터에서 느껴지던 고요함 속의 쓸쓸함. 근데 그게 참 편안한 느낌이더라.


안압지에 갔을 땐,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던 할아버지 그리고 니가 그렇게 이쁘다고 말하던 밤 풍경, 지금 생각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거 같아. 그런데 그 때 들었던 설명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그 때 들을 땐 참 대단하다 생각했고 많이 감탄도 했었는데 말이야.


친구야, 우리가 놀러 다니면서 경주 황룡사터나 안압지에 갔을 때 말이 없어서 더 편안했던 거 같기도 해.


일상 속에서 말이 없었다면 어쩌면 갑갑하고 이상할 테지만 풍경 속에서 말없이 너도 나도 그냥 풍경이 되고 풍경처럼 그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게 참 편안하더라.


말없이 그냥 보고 숨쉬고 느끼면서 쉬는 거 같아. 새소리도 듣고, 물 흐르는 소리도 듣고,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지금 편지를 쓰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지만, 보이는 하늘은 황룡사터에서, 안압지에서 봤던 것 같고 내가 그 자리에 가 있는 거 같아.


친구야, 너도 그 때 경주의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길 바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당신은 이 곳에 오셔야 합니다"


김윤정


늦었다 싶었는데 다행히 그리 늦지 않았나 봅니다. 지금 막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 위해 매일 이른 아침 출근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제, 둥실 떠오른 해는 제 이마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습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아침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을 향한 제 기도를 이처럼 뜨는 해와 함께 하는 요즘입니다.


짧고 간명한 읊조림으로 이어지던 제 기도가 끝날 무렵 아침해는 더욱 크고 환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편지를 쓰는 이 곳은 맑고 향기롭게 부산모임의 새 사무실입니다.


문득 몇 년 전 부산역에서 당신을 배웅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남들에게는 3류영화처럼 보일 눈물바람으로 뜻하지 않게 당신을 보냈던 제 마음은 실로 설명할 수 없는 착잡함과 짧은 만남 후의 긴 이별의 아쉬움으로 온통 흔들렸습니다.


다시 가까이서 환한 낯으로 뵐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걱정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제 마음에 다시금 그런 동요가 일고 있음을 뜻하겠지요.


근래 들어 서른 중반을 앞둔 저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치를 가늠하게 됩니다. 옛 어른들의 속담들이 무릎을 치게 하는 때가 점점 많아집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닮아가면서 저도 소위 기성세대가 되어가는건가……합니다.


어찌되었든 편협되고 강박한 저의 성품이 경험을 통해서 혹은 순리적으로, 제가 소통하는 여러 상황과 만남 속에서 역지사지를 깨달아가는구나 하는 자각은 저에게 소중합니다.


어찌보면 불교의 인연법,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절대진리를 향한 첫걸음이 바로 이 역지사지의 헤아림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서른 중반의 제가 깨달아가는 이 이치를 당신은 이미 체득하셨으리라 여깁니다.


하여 진정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치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날마다 매순간마다 당신이 계신 강원도 그 어디쯤에서 당신이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그리며 잠시라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신다면, 당신은 이 곳에 오셔야 합니다.


부디 오셔서 밝아오는 아침 해나 천천히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 노을, 비오는 날의 그윽한 풍경을 함께 바라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이 곳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날마다 땀흘리는 저희 회원님들과 눈빛을 나누어주시고 그 마음들을 담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이미 아시는 박수관 회장님의 맑고 향기롭게에 대한 헌신과 열정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그 날이 올 것이라 믿는 저는 해 뜨고 지는, 비오고 바람 부는 하루하루를 저희 회원님들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겠습니다.


제 삶에서 당신을 알게 한 인연, 제 젊은 날을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게 하신 인연에 엎드려 감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