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서모임은 본 모임 행사(부처님 점안식) 준비 관계로 참가자의 양해를 구해 4월 4일(금)으로 미뤄 실시하였습니다.
이달에는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와 제가 추천한 다릴 앙카의 <가슴뛰는 삶을 살아라> 두 권을 읽고 만났습니다.
유재경 회원님
다릴 앙카의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는 희망과 긍정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어떤 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때 우주가 그 일을 전적으로 도와준다' '기쁨도 타고난 권리이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가슴 뛰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노력이 아니라 절로 된다' '지구별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미 당신들이 무의식 속에서 결정했다' 등 절대의 긍정적인 구절들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어쩜 우주를, 사람을 이렇게 희망적으로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이 모두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신 말씀과 너무나 흡사해서 표현을 달리한 불교의 경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곧 우주이다' '모든 존재는 신의 모습이다'
'모든 생명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구절은 불교의 화엄 사상과 같지 않나 싶다.
결국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얼마든지 가슴 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주별에서 온 바샤르라는 외계인을 통해서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별의 사람들은 행복, 기쁨을 전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슴 뛰는 삶은 무엇인가? 독서모임 중에 질문이 나왔다. 뚜렷한 답을 하지 못했는데 다음날 불현듯이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기로 한 계획이 생각났다. 휴일에 나들이 가듯이 아주 여유있게, 간이 음식점에서 군것질도 해가면서 헌책방 구경과 보고 싶은 책을 구입할 계획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구할 수 있다면 전에 빌려서 읽은 전혜린이 번역한 헤세의 <데미안>과 최명희의 <혼불> 전집을 사고 싶다. 이 두 책은 언제나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책들이니까!
김순덕 회원님
무엇이 이토록 나를 빨려들게 하는가. 회오리 바람의 가장자리나 거센 파도에 휘감기는 느낌.
이 책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강해 나는 읽는 도중 의식적으로 '멈춤'하기를여러번 되풀이하였다.
역자는 이 책을 이미 여러 해에 걸쳐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했지만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전하는 핵심은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 생소하지 않았지만 강한 전류가 흐르는 이 느낌은 단지 머리로 이론화된 관념이 아니라 온통 저자의 삶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이나키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에 내가 오히려 지쳐감을 상기하면 그의 고통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 어떤 물음에서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스럽게 당혹스러운 물음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 대학은 물론 여전히 명예스러운 일터였지만 (중략) 이제 나는 한 不正한 사회의 가운데서 한 엘리트 그룹의 일원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나날의 고투 속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동안에 어떻게 내가 특권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대다수 사람들 위로 갈수록 내가 더 높아져 간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52쪽)
나는 Nobless Oblige 정신만이라도 부탁하고 싶은 피라미드의 꼭데기에 해당되는 이 시대의 소위 지식인들이라고 지칭되는 그들에게 강한 불만과 함께 위와 같은 물음을 마음 속으로 따지고 있었는데 지금 호이나키가 그걸 대신 묻고 있지 않는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고 한 편으로 내 안에 그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의 발로를 조용히 더듬어보았다.
제 7장 "아니오의 아름다움"에서는 나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자동문과 같은 현대적 시스템, 첨단시설들이 인간적 행위를 배제하고 덕행을 부인하며 사회 속에서 도덕적 아름다움이 성장되는 것을 막아버리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과도한 물질적 현대문명을 질타하면서도 자동문에 대한 예와 같이 편리함만 추구했지 여기에 깊은 의미를 간과했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이미 저자가 지적했듯이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문을 여닫을 때 나 또한 누군가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문을 연 채 잡아주고 했지만 그 단순한 행위 속에 무엇인가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일이 문을 빌미로 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도 정리할 겸 모처럼 해운대의 해변도서관에 들렀다.
아! 그런데 이 책이 이 작은 도서관에 별도로 지정된 상판에 꽂혀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
호이나키처럼 대단한 용기는 아니라 해도 단지 이 책을 알고, 전해주고,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왠지 이런 현실이 슬프기도 했다.
창문 밖으로 한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감상하며 어쩌면 이 세상은 거룩한 바보들이 곳곳에 진두지휘할 거라 생각해 보았다.
끝으로 내게 너무 많은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주신 스님과 녹색평론사의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성오 차장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논어(論語)를 읽었다.
어느 날, 공자(孔子)의 편력 여행 중, 수행하던 제자 자로(子路)가 길을 잃었단다. 헤매던 자로는 어느 노인에게 스승의 행방을 물었다.
"저희 선생님을 못 보셨습니까? 노(魯)나라의 공자님 말씀입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사지를 힘써 일하지도 않고, 밭에 오곡을 뿌리지도 않는데, 대체 누구를 선생이라는 건가?(四體不勤 五穀不分 熟爲夫子)"
그리 말재주가 훌륭한 편이 아닌 자로는 노인에게 한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자로를 머물러 묵게 하고 닭 잡고 밥 지어 잘 먹여 보냈다. 자로가 노인의 집을 떠나와서 공자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공자가 자로에게 다시 돌아가 대답을 전하게 했다. 마침 노인은 집에 없었다니까, 자로는 그 집의 아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외어온 말을 줄줄 읊었을 것이다.
"장유의 예절도 폐하지 못하거늘, 군신의 예를 어찌 폐하겠습니까. 자기의 몸을 정결케 하고자 몸을 숨기는 것은 오히려 큰 인륜을 어지럽히게 하는 것입니다.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은 그 의를 행하고자 한 것이니,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논어 미자편 18장)
.....무슨 소리냐 이게. 군자는 이러한 것을 궁색하다고 하는 것이다. 쯧.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게 공자에게 조금 실망해버렸다.
그 뒤, 이번엔 맹자(孟子)를 읽었다.
허행(許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등(藤)나라 문공(文公)에게 와서 살 것을 청했다. 이 무리는 스스로 농사지어 먹고 살며 덕행에 힘썼는데, 진상(陳相)이라는 이가 허행을 만나고 와서 그 훌륭함을 칭찬하며 자고로 진정한 현자는 저러해야 한다고 맹자에게 말했단다. 맹자가 진상에게 허행에 대해 물었다.
"허행은 반드시 자기의 양식을 손수 농사를 지어 먹소?"
"그렇습니다."
"허행은 반드시 옷을 손수 만들어 입소?"
"아닙니다. 허행은 베옷을 입습니다."
"손수 그것을 짜오?"
"아닙니다. 곡식과 바꾸어 옵니다."
"허행은 어찌하여 그것을 손수 짜지 않소?"
"농사짓기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허행은 솥과 시루로 밥을 짓고, 쇠로 만든 쟁기로 농사를 짓소?"
"그렇습니다."
"자기 손수 그것을 만드오?"
"아닙니다. 곡식과 바꾸어 옵니다."
"곡식을 주고 기구와 바꾸어 오는 것은 질그릇 굽는 사람과 대장장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오. 질그릇 굽는 사람과 대장장이가 또한 그들의 기구와 곡식을 바꾸어 오는 것이 어찌하여 농부를 괴롭히는 일이 되겠소? 허행은 어찌하여 질그릇을 굽고 쟁기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소? 모든 것을 자기 집안에서 하지 않고 귀찮게 백공들과 교역을 하오? 어찌하여, 허행은 번거로운 것을 꺼리지 않소?"
"백공들의 일을 농사지으면서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농사를 지으며 할 수 있다는 것이오? 한 사람의 몸에는 백공이 만드는 물건이 모두 필요한 것인데, 만약 자기가 직접 손수 만들어서 쓴다면, 이것은 천하 사람들을 길거리로 이끌어 내어 분주하게 만드는 것이오. 그대는 어찌 농사짓는 일은 중히 여기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오?"(하략, 맹자 등문공편)
...어럽쇼? 이것도 맞는 소리 같은데...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식자(識者)란, 지식인이란,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공자와 맹자의 말이 옳은가, 아니면 노인과 허행의 말이 옳은가?
깨어있는 지성으로서, 할 말을 다 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에 전념해야 하나.
아니면 노동자와 농민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인가. 지성인도, 지식인도, 군자는 더더욱 아니었던 나는 그런 생각을 얼마간 하다 곧 잊어버렸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이 책을 만나고, 이 고집 센 영감님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논어와 맹자를 읽었던 때의 그 질문을 다시 떠올렸고, 여기 또 다른 형태의 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자신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것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며, 끝내 옳다고 생각한 일을 망설임 없이 해나가는 이 사람의 인생에서, 진실로 깨어 있는, 의식 있는 인간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스스로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어찌 세상에 횃불을 밝히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으랴. 시간이 부족하다, 여력이 없다는 말은 변명일 뿐이다. 나태와 안일에 찌든 모습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그리고 저 용기와 의지가 부럽다.
보통 말하길, 현대사회가 지난날에 비해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라고 한다. 물질과 기계의 발전 속도는 현란할 정도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나는 세상이라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뒤쳐질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진보'라고,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모든 얻는 것에는 주어야 할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이렇게 마구 생겨나는 것들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고 있을까.
어쩌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자동문, CD, 현대의학을 소재로 그런 질문을 날카롭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정작 우리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치품일 뿐이며, 오히려 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해가 될 뿐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인간 사회 전체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 듯 싶다.
내맘대로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 : 체 게바라 평전, 크로포트킨 자서전, 스콧 니어링 자서전, 도덕경(노자)
뱀발 하나 : 첫 장(章)부터 읽기가 버겁다면 맨 뒷장부터 앞으로 읽을 것을 권한다.
뱀발 둘 :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궁금해서 사진을 검색해 보았는데, 예상대로 엄청 꼬장꼬장해 보이는 영감님이다. 인상 자체에 타협 따윈 없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를 읽고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 성공관련 서적인 줄 알았다. 그 왜 있잖은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이니 하는, 서점에 가면 언제나 있지만 항상 읽고 싶지 않은 책들. 그러면서도 베스트셀러라며 팔려나가는 책들. 그렇게 많이들 읽는다면 그 사람들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런데, 책을 펼쳐보니, 그게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 얼마 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빵상아줌마'같은 그런 얘기로도 보였다. ... 이거 뭐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교류를 해? 웃기고 있네.
피식 비웃음을 머금고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기에 어려운 책은 아니었기에 수월하게 뚝딱 읽어냈다. 다 읽은 뒤의 감상은, 최소한 비웃음은 아니었다.
이 '채널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진실일 가능성도 똑같은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것이다. 그 '채널링'이 진실이든, 아니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방편이든, 그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너라는 존재가 더할 수 없이 귀중하다는 것을 자각하라.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거기 충실하라. 그게 네 사명이다.
이런 얘기라면 한 번쯤 속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에게 가슴 뛰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껏 내가 가슴 뛰는 삶을 살아온 시간은 얼마나 될까. 책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읽고 나서 생각할 시간은 짧지 않은, 그리고 짧지 않아야 할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강희정 간사
이번 책만큼 힘들게 읽은 책이 없었던 것 같다. 힘들었다기 보다는 마음에 부담을 많이 가지고 읽었던 책이었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빨리 읽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빨리 숙제를 마치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충대충 읽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그렇게 그냥 가볍게 읽고 넘겨버릴 책은 아닌데 하는 자책하는 마음에 더 힘들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어떤 현상에 대한 생각들과 시각들을 보면서 어. 정말 그런 생각들이 들기도 했고 한번쯤 생각해 봤지만 그냥 지나쳐버렸던 일들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은 것 중 한 가지는 작가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서 보여주었던 행동들과 생각들의 깊은 곳에 부모님께서 몸소 보여준 삶의 자세가 참 중요했다는 것이었다.
자녀 교육을 말로만 하신게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신 부모님들께서 참 훌륭하셨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작가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지만 매순간 치열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삶이 참 대단하다 생각된다.
김윤정 과장
호이나키 교수의 이 책을 처음 소식지에 소개할 때, 쫓기는 마감시간 속에 소개글을 잡아내지 못해 스스로 무참하던 생각과 더불어 3개월 가까이 하루 2시간도 채 잠들지 못하고 지속된 불면증으로 이 책의 시작은 내가 만난 어느 책보다 어렵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갈피를 잡기 시작하면서 저자의 글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정의의 길로..>를 따박따박 읽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 인상에 박힌 부분은 무엇보다도 각 장의 첫부분에 있는 발췌 인용문들이 어쩜 그렇게 본문글의 내용을 함축적이고도 강렬하게 잘 담아내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문글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곤 하였다.
이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저자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매순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사회의 바탕에 있는 진실인가?', '이것이 우리 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인간관계의 정형인가?' 하는 물음들이었다.
지식과 현실 사이의 큰 간극이나 본질적으로 오류인 오늘날의 그릇되고 허황된 지식들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는 마치 구도자와 같은 그는 숨쉬는 매순간순간 부단히 고뇌하고 비틀거리며 삶을 살아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실로 '우주적인 도덕적 감각'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을 향한 그 지고지순한 정진의 자세에 대해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눈물이 났다. 그리고 고맙고, 또 부끄러웠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면 호이나키와 같은, 철저히 자기 중심을 세우고 순간순간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설령 비틀거릴지언정 정의라는 대의를 향해 삶의 방향타를 놓치지 않고 꼿꼿이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걸까..하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제 8장 '나 자신의 죽음을'에서 아버지의 생애를 추억하는 글 속에서, 아! 그런 아버지가 계셨기에 이런 아들이....하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동양적인 사고와 지혜는 동양적인 것에 한하는 것이라고 책의 앞부분에서 그는 말했다. 서양 문화와 범주 내에서 자구책을 간구하려는 그의 자세는 오히려 바람직하다.
모든 것이 동양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일원적인 자세보다 건강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서 '비젼의 경제'에서 동양의 대표적 지혜자인 간디의 철학을 긍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애국심에 대한 부분도 보다 바른 것, 옳은 것 궁극적으로 선한 것을 향해 스스로 궤도를 수정해나가는,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몸소 보여주었다.
'필요한 것은 훨씬 더 친밀한 행동이다. 나는 살과 피로 된 존재이다. 사랑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것이건 타인에 대한 것이건 근원적으로 육화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실이 승인되고 실제로 구현될 때 사랑은 진정한 것이 된다. (268쪽)'는 구절을 읽으면서 2008년 3월 법정스님의 <산방한담> 말씀들이 오버랩 되었다.
리 호이나키 교수가 작고하지 않으셨기에 2008년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그와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 점을 아주 복된 일이라 생각한다.
뿌리뽑힌 지식인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어왔고, 그 속에서도 밝게 눈 뜨고 실천하는 용기있는 선각자들 또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이 책은 자칫 매우 사변적인 책으로 읽혀질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나는 저자의 단단하고 굳은살들이 만져졌다. 그리고 그의 아날로그적이고 종교적 초월자로서의 아나키즘적인 한평생의 삶 앞에 존경의 찬탄들이 절로 터져나왔다.
리 호이나키 선생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으면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소설가 김훈 선생도 자꾸 연상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기율로 삼을 만한 주옥같은 네 문장들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며 묵상에 잠겨본다.
'경계가 정해진 장소 속에서 선한 것을 찾고 나의 직접적인 환경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정주 속에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 나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되었다.' (38쪽)
고도로 발달된 복지제도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접촉할 필요가 없고, 타자의 존재를 느낄 필요도 없으며, 아무도 딴 사람에게 다가갈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고안,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이런 추론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사회가 완벽한 제도를 갖출수록 그만큼 아름다움은 소멸되고, 그만큼 사회는 괴물스러운 것이 되며, 그만큼 덕행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된다. (182쪽)
오늘을 인간답게, 가능한 한 자율적으로 고결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결정은 명확히 말해져야 하고, 매일 말해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 내게는 규칙적인 성찰, 즉 내가 무엇을 거부했으며, 내가 아직도 무엇을 받아들고 있고, 무엇을 마지못해 견디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내가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갈 고요의 시간이 필요하다.(190쪽)
오늘날 내가 제대로 맛을 느끼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껴안기 위해서, 이 시대에서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그리고 이 순간 세계 속에 내가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서 나는 헤나시의 독거혈, 소로우의 감방에 해당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3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