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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 08-08-26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그 안개속을 걸으며..

본문

도토리와 지팡이의 8월 보물찾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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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전나무숲의 공사로 문화적 설명이 많은 하루였습니다.

아무렴 어때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좋기만 한걸...


1457년(세조12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세조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현덕왕후는 얼굴에 분노의 빛을 띠고 세조를 향하여 꾸짖었다.

 “너는 참으로 악독하고 표독하구나. 내 아들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도 그래도 부족하여 벽지인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처럼 악착스러우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그러면서 눈을 부릅뜨고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세조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한참 만에야 겨우 현덕왕후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다. “지독한 놈! 그래도 살고는 싶은 게로구나!” 그러면서 왕후는 그의 몸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세조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 뒤였다. 세조는 반정 이후에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이런 꿈을 꾸고서 마음이 섬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마 후 동궁 내시가 달려와서 황급히 아뢰었다.

 “전하, 동궁의 최내관이옵니다. 방금 전에 세자마마께서 잠을 주무시다가 가위에 눌리셔서 매우 위중하시나이다.” 이 말을 듣고 난 세조가 급히 동궁에 행차해 보니 이미 세자는 목숨이 끊어져 있었다. 실로 약 한 첩 써볼 겨를도 없는 급변이었다.

 세조는 맏아들의 죽음이 형수인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기고, 관리를 보내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평민의 무덤(墓)으로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세조의 명을 받은 신하가 현덕왕후의 능을 파고 관을 꺼내려 했지만 웬일인지 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 능에서 꺼내진 관은 34일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당했다가 물가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한편, 그 이후 세조에게는 또 하나의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현덕왕후가 뱉은 침을 맞은 곳에서 흉칙한 종기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면서 점점 악화되었다. 세조는 전국 방방곡곡의 명의를 불러모아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신통치 않았고, 그 어떤 신약을 써 보아도 별 효험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려보기도 하지만 효험이 없었고, 결국 죽는 날까지 이 악성 피부병에 시달려야 했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줄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요."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며,목욕을 할

때 관대를 걸어두었던 그곳이 지금의 관대걸이다고 한다.


-신나는 내일 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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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원을 빌며 고양이를 만졌길래 저리 흐믓한 표정인지...


조선 제7대왕 세조는 고양이와 인연이 깊은 임금이다. 온몸에 생긴 종기로 고생하던 세조가 상원사에 몸을 치료하고 이듬해 다시 찾았을 때의 일이다. 세조가 법당으로 들어서서예불을 올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세조는 즉시 병사를 풀어 법당을 뒤지게 했고, 그 결과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숨어 있던 자객 셋을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객의 칼에 의해 세조 목숨이 위태로웠음이 분명했다. 하여 세조는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찾았지만 고양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세조는 그 고양이에게 직접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논 5백 섬지기를 절에 내리면서 해마다 고양이를 위해 제사 지내도록 명했다.


이로 인해 이 때부터 절해는 묘전(猫田 : 고양이 논), 묘답(猫畓)이란 명칭이 생겼으며 절에 바치는 쌀을 ‘고양이를 위한 쌀’이라는 뜻에서 ‘고양미’로 불렀다.


일설에 따르면 그 후 ‘고양미’가 ‘공양미’로 발음이 변했고,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 모셔진


상원사 청량선원 입구 계단 좌우에 있는 고양이 석상은 그 사건을 기린 조각이라고 한다.

-신나는 내일 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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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는 좀 어려웠다고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였대요...


종의 주둥이 부분은 주악천과 인동무늬로 장식한 넓은 띠로 장식하였는데 당좌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좁혀 들다가 다시 바짝 죄어 조붓하게 마무리지음으로써 소리가 갑자기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입으로 한꺼번에 다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는 종 안을 맴돌아 위로 오르니, 이를 위해 종 머리는 용통(甬筒)을 마련해서 위로 오른 소리가 빠져 하늘로 오르도록 하였다. 용통은 춘추시대 <자범화종>과 같은 용종(甬鐘; 자루 달린 종)의 자루에서 생각을 얻어낸 것이다. 중국 용종의 용(甬)이 다만 손잡이 구실을 하는 단순한 종자루로 속이 막혀 있었던 것을, 속을 뚫어 소리가 이곳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르게 하였다. 종을 거는 걸쇠꼭지는 역시 <번훼문박>의 포뢰(浦牢)형 걸쇠꼭지에서 그 형상을 빌려다가 고유화시켰다. <상원사 동종>에서는 한 마리의 포뢰가 등에 용통을 짊어진 채 종머리 천판(天板; 천장반자) 위에서 네 발로 힘주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용통을 짊어진 포뢰의 등줄기는 휘어 오르게 마련이니 이 휘어오른 포뢰의 등줄기가 바로 종을 거는 걸쇠가 되었다. 용통은 고사리 무늬가 장식된 연꽃잎을 둘러 붙여 꾸몄는데 아랫단은 장구통처럼 연꽃잎을 아래위로 마주대며 구슬무늬띠로 나눠 놓았고 윗단은 위로 솟은 연꽃잎만 표현하였다. 포뢰는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힘겹게 소리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으로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삼국 오나라 때 사람인 설종(薛終)이 ‘서경부(西京賦)’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닷속에 큰 물고기가 있으니 고래라 하고 또 큰 짐승이 있어 포뢰라 한다. 포뢰는 본디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가 포뢰를 치면 문득 크게 운다. 무릇 종으로 하여금 소리를 크게 내도록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까닭으로 포뢰를 위에 만들고 치는 것은 고래로 만든다.”

그러니 고래 형태로 만든 경목(鯨木)으로 맞은 포뢰는 고통과 두려움에 못이겨 크게 울부짖을 터이니 <상원사 동종>의 포뢰가 이와 같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포뢰는 용왕의 아홉 자식 중에 울기를 좋아하는 용이라 한다.

이 <상원사 동종>은 조선왕조 전기에 억불정책에 따라 각처에서 절을 허물 때 경상도 안동부로 옮겨와 안동부의 정문 문루인 관풍루(觀風樓)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화(成化) 5년(1469) 기축, 즉 예종 원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지정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멀리 들리는 종을 구해 오라는 왕명에 따라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졌다 한다.

이 내용은 만력 36년(1608) 무신, 즉 선조 41년에 권기(勸紀, 1546∼1624년)가 편찬한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권6 고적(古蹟) 누문고종(樓門古鍾; 누문에 걸린 옛 종)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무게 3379근이며 이를 치면 소리가 크고 맑아서 멀리 10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강원도 상원사는 곧 (세조의) 내원당이라, 멀리 들리는 종을 두고자 하여 8도에서 구하였는데 본부의 종이 가장 으뜸이었다. 성화(成化) 기축(1469)에 나라의 명령으로 장차 옮겨가려고 죽령을 넘는데 종이 슬피 울면서 지극히 무거워져서 넘을 수가 없다. 종의 젖을 떼어 본부(안동부)에 보낸 후에야 운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상원사에 있다(重三千三百七十九斤, 撞之則聲音雄亮, 遠可聞百里. 江原道上院寺, 乃內願堂也. 欲置遠聞之鍾, 求八道, 本府之鍾爲最. 成化己丑, 以國命, 將移運踰竹嶺, 鍾幽吼極重, 難越. 折鍾乳, 送本府後, 可運, 至今在上院寺).”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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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한번 꽃을 피우고 지는 대나무(조리대)는 새로운 새대에게 자리를 비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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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맞까봐 조용히 잎이 덮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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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봉선화...흰색은 드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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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봉선의 매력은 옆모습입니다..

흰색이라 그런지 더 코끼리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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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사랑하는 마음은 상처에도 꺾이지 않고 길게 뻗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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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의 공사가 끝나면 맨발로 숲길을 걸을 수 있을겁니다.

다음엔 함께 걸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