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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 08-03-23

    겨울의 추억이 된 남도 기행 - 필암서원,무위사.미황사,땅끝,고천암호를 돌아오다.

본문

무자년 1월 초 우리 식생문화탐사 4기 회원들이 가칭 두목회(매달 두 번째 목요일 모임)란 이름 아래 다시 뭉쳤다. 공식적인 모임은 지난 연말로 끝을 맺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터라 겨울의 한복판에 봄기운을 찾아 남녘으로 떠났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 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갈아 타고 장성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10여분 거리에 있는 필암서원에 먼저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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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은 송강 정철의 스승인 하서 김인후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입구에는 수령 2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 아래로 홍살문이 서있다. 그 뒤로 문루이자 휴식처인 확연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유생들의 강학 공간인 청절당이 나온다. 더 뒷편으로 생활 공간인 숭의재와 진덕재가 서,동으로 마주하여 자리잡고 있고 제일 뒤로는 사당을 모셨다. 그밖에 숭의재 옆으로는 정조의 친필 초서인 사액을 내건 경장각이 있고 그 안에는 인종의 어필 묵죽도(墨竹圖)가 모셔져 있다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볼 수는 없었다.

각 채 마다 걸린 편액들의 글자 풀이를 해 보았다.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엄정하게 할 것이며(廓然樓), 맑은 마음과 대쪽 같은 절개를 지니며(淸節堂), 의를 숭상하고(崇義齋), 덕으로 나아가며(進德齋), 바위 같이 단단한 붓이 되리라(筆巖書院)! 당시 선비들의 기개가 묻어나오는 듯 했다.


필암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육군 전투전문가를 육성하는 학교인 상무대가 있다.

엄경숙님과의 인연으로 상무대 소속의 화학학교장 이취임식에 참석하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었고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13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광주시 외곽도로를 벗어나니 나주평야를 지나는데 차창 밖으로 빨간 석양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영암에 이르니 월출산의 첩첩히 쌓인 뾰족한 바위들이 자태를 드러내고 어둑해서야 우리는 무위사 앞에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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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의 사천왕문 앞에 서니 절을 품은 산세도 無爲寺라는 이름에 걸맞게 순한 구릉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문을 들어서서 나즈막한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극락보전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인다. 땅거미가 내린 경내에는 포근한 정적 마저 감도는데 마침 저녁 예불이 시작되어 함께 할 수 있었다.

무위사는 삼국통일 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이후 선종인 가지선문의 선각국사 형미가 중창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만덕산 중심의 법화신앙 결사운동의 영향으로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고 이후에는 수륙재를 지내는 수륙사로 지정되었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해 환생케 하는 재생의식으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의식인데, 이런 신앙구조 속에서 아미타불이 조성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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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의 아미타 삼존불 뒤에는 여느 절의 탱화 대신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앉아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계신다.

백의관음도는 본존불 벽화와 등을 맞대고 있어 뒤로 돌아가야 볼 수 있다. 흰 옷을 입은 관음보살은 떠내려 가는 연꽃가지 위에 버들가지와 감로수 병을 들고서 옷깃을 날리고 계셨다.

그 밖에도 27점의 벽화들이 법당 안쪽 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따로 보존각에 보관, 진열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려식 조선초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란다.

좀 더 천천히 무위사 경내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어둠이 내려서 오늘밤 절방을 빌리기로 한 미황사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깜깜해서야 미황사에 도착하니 절에서 운영하는 한문 학당에 참가하고 있는 아이들의 조잘거림이 들려온다. 이래저래 잠을 설치다 보니 어느새 새벽예불 시간이 되었다. 예불과 아침 공양을 한 뒤에 새벽 어스름을 뚫고 달마봉 부터 오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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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은 해발489m의 바위산으로 꽤 경사가 가파라서 오르기가 녹녹치 않았다. 40여 분을 가뿐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니 다도해의 장관이 빙 둘러 펼쳐지고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축조한 봉화대가 서있다. 달마봉을 오르내리는 길 중간 중간에 김선생님이 남족지방 특유의 식생들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붉가시나무와 사스레피나무, 생달나무, 시누대, 후박나무, 청가시덩쿨, 송악등 작년에 우리가 주로 둘러 보았던 중부 이북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난대 식물들이다.

동박새와 직빡구리의 모습도 보였다. 새들은 번식기를 맞아 바삐 날아다니며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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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가까이로 내려오니 키 큰 동백나무가 벌써 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백꽃은 벌이나 나비가 활동하지 않을 때 겨울새의 도움으로 수분을 한다고 한다. 그 새가 바로 동박새인데 겨울에는 동백나무의 꿀을 먹고 열매를 맺으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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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던 대웅보전의 모습이 이제서야 뚜렷이 보인다.

미황사에는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경덕왕 때 배 한 척이 땅끝 마을 사자 포구에 와 닿았다. 그 배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고 화엄경,법화경등의 경전과 불상 그리고 검은 돌 한 개를 싣고 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들을 바닷가에 내려놓고 모실 장소를 의논할 때 검은 돌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가 산골짜기에 이르러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미황사를 지어 불상과 경전등을 모시니 이는 전날에 의조 스님이 꾼 꿈에 금인이 이른 대로 따른 것이란다. 미황사의 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움소리에서 따왔고, 黃은 금인의 황금빛에서 따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같은 미황사 창건 설화는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 하는 이야기이니 주목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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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웅보전 기둥의 주춧돌에는 게와 거북이를 새겨 대웅보전이 배 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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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을 지나 500여m 쯤 올라가면 20여기의 부도를 모신 부도전이 있다.

조선 후기인 1700년 경 부터 세워졌는데, 모셔진 스님들은 당시 미황사와 인근 대흥사 대중의 존경을 받던 큰 스님들이다. 이 부도전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사세나 이 곳을 중심으로 정진했던 스님들의 수행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맛있는 점심 공양 까지 얻어 먹고서야 미황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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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까지 내려 왔으니 잠시 땅끝 마을에 들렀다.

전망대에 올라 한반도 최남단에서 바다를 조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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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일정을 마치고 상경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고천암호였다.

인공 방조제 공사로 2001년에 생겨난 인공 호수로 겨울이면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이맘 때면 수 십만 마리의 가창 오리 떼를 볼 수 있단다. 그런데 이번 겨울이 덜 추워서 오리들이 천수만이나 금강 하구에만 머물고 여기 까지 내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김선생님이 걱정을 하시는데 무성한 갈대숲 너머로 녀석들이 시커멓게 무리지어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고 field scope을 통해 얼굴에 선명한 태극무늬를 띤 가창오리 숫놈들이 수면에서 유영을 즐기고 자맥질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창오리는 세계적인 희귀종으로 시베리아 중.북부에서 번식하여 그중 98%정도가 한반도를 찾아 월동한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어서 저녁 해가 질 무렵에 먹이 활동을 하러 가면서 펼치는 화려한 군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지난 겨울에 봄을 그리며 남도로 갔던 여정,

이제 봄이 우리곁으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