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모음
<잊을 수 없는 사람>
12월입니다.
한 장 남은 마지막 달력이
스산한 바람만큼 쓸쓸합니다.
한 해를 보내며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돌아봅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하는 사람.

1956년 겨울.
법정스님께서는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홀로 안거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하동 악양이라는 농가에서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야 할 암자에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으로 겨울을 나러 왔다는 수연스님.
항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묻는 말에나 대답하셨던 그를
스님께서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라 말씀하십니다.
안거가 끝나면 함께 행각을 떠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다니자며 마냥 부풀어 있던 어느 날,
법정스님께서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습니다.
열이 오르고 자꾸 오한이 들며
밤이면 헛소리까지 하는 스님 머리맡에서
그는 줄곧 앉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목이 마르다 하면 물을 끓여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주느라고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가 돈 한푼 없는 처지이기에
그는 장장 80리 길을 걸어 구례에서 탁발을 하고
그 돈으로 약을 지어 밤 10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함든 내색없이
부엌에서 약을 달여 와 마시라고 건네 주시는
그의 헌신적인 정신에 스님은 그만
어린애처럼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의 일을 법정스님은 잊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온 심신(心身)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行)’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깨우쳐 주었던 시절.
항상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
따뜻한 손길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던 그.
그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셨답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 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박인환 시인의 말처럼
‘잊혀진 얼굴’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12월을 지나며
다짐해 봅니다.
한겨울
하얀 눈 속에서도 푸르른 대잎 처럼

<버스 안에서였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주머니 칼를 꺼내더니
창틀에서 빠지려는 나사못 두 개를 죄어놓았다.
무심히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감동했다.
그는 이렇듯 사소한 일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