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께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칭호가 ‘작가’였다.”
10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서 덕조 스님을 만났다. 그는 법정 스님의 맏상좌다. 절집의 맏아들이다. 최근 덕조 스님은 법정 스님이 직접 쓴 원고지 원고를 찾아내 『진리와 자유의 길』을 35년 만에 출간했다. 법정 스님 열반 후에 온갖 짜깁기 책들이 쏟아졌다. 정작 법정 스님이 직접 쓴 책은 2008년 『아름다운 마무리』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서울에 잠시 올라온 덕조 스님에게 ‘절집 아들이 보는 아버지, 법정 스님’을 물었다.
덕조 스님이 불일암 서재를 정리하다가 찾은 법정 스님의 자필 원고 뭉치를 꺼냈다.
Q : 법정 스님은 “책 출판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책을 출간한 이유는.
A : “성철 스님께서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이란 책 원고를 시봉하던 원택 스님을 통해 법정 스님께 보낸 적이 있다. 당시 성철 스님은 ‘글은 법정 스님이 제일 잘 본다’고 말했다. 불일암을 찾은 원택 스님에게 법정 스님은 ‘이건 법공양을 하지 말고, 정식 출판을 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이 말을 듣고 성철 스님께서 화를 내셨다고 한다.”
Q : 왜 화를 내셨나.
A : “‘나보고 책 팔아 먹으라고 그러느냐!’고 소리를 치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법정 스님이 책을 출간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Q : 그게 뭔가.
A : “하나는 법공양을 해서 무료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1000명, 혹은 2000명밖에 못 본다는 거다. 그것도 주위에 인연 있는 사람들만 본다.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못 본다. 또 하나는 시중에 유통이 안 되면 책이 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유가(有價)로 출판을 해야만 서점에도 남고, 도서관에도 남는다고 했다. 그래야 성철 스님의 법문이 두고두고 남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법정 스님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통해 "마음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만드는 운동을 펼쳤다. 지금도 '맑고 향기롭게'는 그 유지를 잇고 있다. [중앙포토]
법정 스님의 두 가지 이유를 들은 성철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래, 법정 스님한테 한번 속아보자.” 결국 성철 스님의 책은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됐다. 원택 스님은 20년 넘게 성철 스님을 시봉했다. 덕조 스님도 법정 스님의 맏상좌다. 이번에 법정 스님이 직접 쓴 저서를 출간하면서 덕조 스님은 적잖이 망설였다. 스승의 유언 때문이었다. 결국 원택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Q : 왜 전화를 걸었나.
A : “큰스님을 오랫동안 모시면서 원택 스님은 많은 경험을 하셨다. 자문을 구했다. 은사(법정) 스님은 책을 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데도 스님과 관계된 짜깁기식 책들이 마구 쏟아졌다. 정작 법정 스님이 직접 쓰신 책은 출간이 안 되는데 말이다.”
Q : 어떤 결론을 얻었나.
A : “결국 욕 먹는 건 나 하나로 끝나지만, 은사(법정) 스님의 책은 기록물로 남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용기를 냈다. 그걸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래서 출간을 결심했다.”
덕조 스님이 법정 스님이 직접 쓴 원고지를 보여주고 있다. 1986년 당시 송광사 수련교재로 쓰인 글이다.
Q : 바깥에서는 제자들이 출판 인세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도 일부 있다.
A : “그건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모든 출판 수익은 법정 스님이 세우신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환경운동을 하는데 모두 쓰인다. 사적인 전용이 불가능한 구조다. 상좌들은 은사 스님 책의 출판 수익을 바라는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 당연히 가져서도 안 된다.”
Q : 법정 스님은 왜 책을 다 없애라고 했나.
A : “평소에도 ‘말 빚을 지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정리정돈하는 성품이셨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외출을 할 때는 서랍에 유언장을 남기고 다니셨다고 한다. 은사 스님도 외출할 때는 방안의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우고 가셨다. 그런 정신이 있으셨다. 수행자의 뒷모습을 남기지 않겠다는 정신 말이다. 그런 게 책을 절판시킨 이유이지 않겠나.”
최근 출간된 법정 스님의 저서는 『진리와 자유의 길』이다. 원고 작성 35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원래는 1986년 법정 스님이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을 때 직접 쓴 수련교재였다. 그게 자필 원고와 낡은 비매품 책자로 불일암 서재의 먼지 속에 꽂혀 있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말이다. 덕조 스님이 자료 정리를 하다가 뒤늦게 찾아냈다.
1986년부터 송광사 수련교재로 사용됐던 법정 스님의 글이다. 비매품으로 제작돼 지금은 송광사에도 남아 있는 책이 없다.
인터뷰를 하던 덕조 스님은 탁자 위에 해당 원고와 비매용 책자를 꺼냈다. 낡은 표지에 ‘1987년 여름 수련교재’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 아래에는 ‘송광사 수련원’이란 글귀가 선명했다. 법정 스님은 1980년부터 91년까지 11년간 송광사 수련원장을 지냈다. 1986년에 처음 쓴 원고를 매년 보완 수정하면서 수련교재로 썼다. 법정 스님의 자필 원고에는 빨강ㆍ파랑 펜으로 써놓은 메모가 곳곳에 있었다. 이 원고를 본 송광사 어른 스님들은 “아, 이거 송광사 박물관에 보관해야겠다”고 했다. 덕조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법정 스님이 해인사에 살던 시절이었다. 해인사는 장경각에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법보(法寶) 종찰이다. 어느날 장경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한 할머니에게 법정 스님이 인사를 했다. “팔만대장경 보셨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답했다.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노? 아, 그 빨래판!” 그 말을 듣고 법정 스님은 절감한 바가 있었다.
Q : ‘빨래판’ 소리에 무엇을 절감했나.
A : “팔만대장경을 우리는 엄청난 국보로 여기지만, 그걸 모르시는 분한테는 빨래판에 불과하다. 은사 스님은 ‘부처님 경전이 누구한테는 보배일지 모르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돌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그때 불교 경전을 쉽게,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다. 이 원고도 마찬가지다.”
인터뷰를 하다가 덕조 스님이 은사인 법정 스님이 이야기를 하다가 말문을 잃고 먹먹해하고 있다.
Q : 무엇이 마찬가지인가.
A : “박물관에만 보관되면, 이 원고는 빨래판에 불과하지 않겠나.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은 원고라 해도, 그냥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끝나지 않겠나. 생전에 은사 스님은 ‘작가’라는 칭호를 가장 듣기 싫어하셨다.”
Q : 법정 스님은 세상이 인정하는 작가다. 왜 그 칭호를 싫어했나.
A : “당신의 정체성은 작가가 아니라 수행자라고 했다.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지, 글 쓰는 작가가 아니라고 했다. 법정 스님은 좋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불교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셨다. 그게 글을 쓰는 이유였다. 사실 1980년대에는 대중을 위한 불교 서적이 거의 없었다. 그 당시에 이런 책을 쓰신 거다. 그러니 이 책이 얼마나 값진가. 박물관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다.”
법정 스님은 2010년에 열반했다. 순식간에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열반 당시만 해도 ‘무소유’하면 ‘법정 스님’이었다. 스님의 수필집을 자양분 삼아 젊은 시절을 지나온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법정 스님의 다비식에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2010년 송광사 근처 숲에서 열렸던 법정 스님의 다비식. 숱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법정 스님의 열반을 애도했다. [중앙포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덕조 스님은 “불일암에 있으면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종종 찾아온다. 그런데 선생님은 법정 스님을 아는데, 학생들은 법정 스님을 모르더라. 스님의 책이 절판된 지난 10년이 가져온 단절감을 그때 느꼈다”고 말했다. 또 ‘맑고 향기롭게’ 재단에서는 생활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을 선발해 1년에 300만 원씩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장학생으로 선발된 30명 가운데 법정 스님을 아는 학생은 5명에 불과했다. 덕조 스님은 “10년이란 단절감을 그때도 크게 절감했다”고 했다.
생전에 법정 스님은 엄한 성격이었다. 특히 남들보다 자신에게 무척 엄격했다. 많은 행자가 법정 스님의 상좌가 되고자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젊은 시절 법정 스님에게는 세 가지 철칙이 있었다. 첫째 주지 안하는 것, 둘째 상좌를 두지 않는 것, 셋째 유교식으로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두루마기를 입지 않는 것. 평소 “출가 수행자는 단출하게 입어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 철칙을 깨고 처음으로 받은 상좌가 덕조 스님이었다. 행자 시절, 송광사와 불일암을 뛰어다니며 우편물 배달과 심부름하던 그를 법정 스님이 좋게 본 것이다. 법정 스님이 해인사에 살던 젊은 시절 얻은 별명이 ‘억새풀’이었다. 억새풀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이 베인다. 수행하며 시퍼렇게 사는 법정 스님에게 도반들이 붙인 별명이다.
덕조 스님이 행자 생활이 끝날 무렵 법정 스님이 '덕조'란 법명을 지어주며 상좌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행자 생활이 끝날 무렵, 법정 스님은 그에게 법명을 지어주며 상좌로 받아들였다. 법정 스님은 “네가 보다시피 나는 까탈스럽고, 항상 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덕 있는 노스님을 모시며 살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덕 있는 할아버지를 대한다는 마음으로, 네 이름을 ‘덕조(德祖)’라고 지었다”고 했다. 뜻밖의 승낙에 기뻤던 덕조 스님은 송광사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법정의 상좌 수락은 당시에 파격이었다.
덕조 스님은 “법정 스님의 깔끔한 성품이 책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며 불교의 요체가 깔끔하게 담겨있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목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닿았으면 했다. 35년 만에 살아난 법정 스님의 책 『진리와 자유의 길』 뒤표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길 바란다.
부처는 대자유인이다.
부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이 부처답게 사는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정 스님이 건네는 소낙비다.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법비 한 줄기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서 덕조 스님이 법정 스님의 사진 앞에 서 있다. 손에는 법정 스님의 육필 원고를 들고 있다.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