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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04-03-20

    수행

본문

1박2일 맑고 향기롭게 선 수련회의 수련생으로 참가합니다. 혹자는 멀리 여행을 떠나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토요일 저녁 연인과 또는 친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를 감상하고 있는 사람, 시청 앞에서 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진한 담배연기 속에 한숨을 날려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병원에 있는 사람, 지금 이 순간도, 그 누군가는 망자가 되어 세상을 달리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수련생의 신분이 되어 1박2일 묵언에 동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1박2일이 아닌, 평생을 몸소 수련생으로 살고 계시는 길상사 스님들과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원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는 기생들이 술을 따라주었던 유명한 요정이었다고 합니다. 술과 노래, 여색과 밀담이 오갔던 그 공간이 오늘은 극락전 금불상 아래 부처님을 길러내는 사원으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부문화의 전형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이와같이 흐뭇하고 넉넉한 감흥의 상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의 회원 자격으로 오고 갑니다. 설법전 앞 관음상 주변에서는 종교를 초월한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이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됩니다. 이 곳에선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합장하며 서로를 경배할 수 있습니다. 합장 인사를 통해서 순간순간 우리는 서로가 생불임을 서로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이 아름다운 생태사찰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봄햇살을 맞이합니다. 햇살을 부여안습니다. 햇살과 부대낍니다. 수련회 입재식이 끝났습니다. 드디어 그 어느 수련생이 척추를 바로 세우고 앉아 호흡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묵언. 묵언 속에서 나는 멀리 여행을 떠납니다. 묵언 속에서 나는 일에 파묻혀 살고 있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내 가족을 대신하여, 내 가족과 함께 나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묵언 속에서, 그 고요한 정신의 침잠 속에 나는 폐 깊숙이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밖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나는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노래방에서 정신 없이 고성을 지르고 몸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영구차 안에서 그 어딘가로 실려가고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합니다. 꿈인가. 꿈이련가. 다리가 아픕니다. 다리가 아프기만 한 듯 합니다. 다리만 아픕니다. 다리가 아픕니다. 그리고, 다시 화두. 이렇게 이곳의 정지된 시간이 흘러갑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나를 수련생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직장에서 누구였습니다. 지위도 그 무엇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직장도 없고 직책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개 엄마이기도 하고, 그 누구누구의 아들이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 살고 있고 어디 출신이며, 나이도 있고 독실한 기독교인 혹은 불교신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나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단지 수련생으로만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떨결에 참여한 수련생으로서, 남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일요일 새벽 나는 잠에서 깨어나도록 강요받습니다. 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내에 울려퍼지는 어느 이름 모르는 스님의 도량석 소리가 내 영혼을 흔듧니다. 그렇게 느껴집니다. 해는 뜨지 않았고 새벽 공기는 차갑습니다. 드디어 새벽예불이라는 것을 올려 보는 시간. 남들 다 자고 있는 이 시간. 마누라는 뭘 하고 있을지. 나지막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타종소리 말을 건넵니다. 지심귀명례,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 나 혼자만의 풍경 소리 듣고 있습니다. 다시 설법전에서 108배를 합니다. '108번뇌'라는 익히 알고 있는 어휘가 뇌리를 스칩니다. 하지만 108분의 부처에게 절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108명은 자기자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겠습니다. 문득, 부처는 108명뿐이지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 모두는 108명뿐이지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고. 고요합니다. 정적뿐입니다. 정적이 가득 합니다. 세상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마음이 또한 그렇습니다. 해탈하고자 이 곳을 찾진 않았습니다. 열반에 들고자 이 곳을, 미처 찾진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그 나, 나는 이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한참 단잠에 들었을 일요일 아침,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자신을 한발짝 물러나서 응시합니다. 그 아무도 모를지 모릅니다. 이 가부좌가 거대한, 웅대한 예불이라는 사실을. 앉아 있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열반에 들어 있습니다. 일체유의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금강경의 인연 있을까. 나는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너무 졸려 깜박 고개를 떨어뜨리고마는 그 내가 말입니다. 1994년 버클리음대 졸업식에서 가수 스팅은 연설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종교가 있냐고 물으면 저는 독실한 음악인이라고 답하지요." 또 이런 말도 생각이 납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그 오늘은 어제 그 누군가의 내일이었다는. 경행을 하고 다시 좌선에 듭니다. 눈을 천천히 떠봅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나는. 호흡을, 천천히 숨을 들이마십니다. 또 아주 깊숙히 숨을 들이마십니다. 온 몸에 퍼져가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미세하게 탐지할 수 있습니다. 내 피부는 숨결이 되어 세상과 호흡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하산의 시간. 하산해야 할 것입니다. 도반들이 그리울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법정 스님의 '텅빈 충만'을 아주 천천히, 한장한장 한줄한줄 느리게 다시 읽어보리라, 합니다. 수행. 세상에는 아름다운 말들이 참 많습니다. 너무 흔해져 의미를 상실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자비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 수행이라... 아마도 나는, 우리 모두는, 그 어느 누구도 1박2일의 수행자이지만은 아닐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