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땅…그들 모두 선승이었다” '60일간의 대장정’ MBC 창사특집 HD 다큐멘터리 ‘티벳 대탐사’의 방송을 앞둔 임채유 PD는 “티베트 사람들은 모두 선승처럼 평화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임PD는 지난 9월 국내 방송 사상 처음으로 정치적·자연적 이유로 ‘금단의 땅’이었던 해발 4,000m 이상의 고원지대 티베트를 탐사하고 돌아 왔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고승처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산다’고 한다”면서 “경제적으로 모자란다는 인식도 없이 광대한 평원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경외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티베트의 대자연과 일상을 보여주는 1부 ‘창탕, 정복되지 않은 대지’(6일 밤 11시15분)와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2부 ‘신들의 땅 카일라스’(7일 밤 11시30분)로 구성된다. 4일 오후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본 1부는 HD 영상으로 장엄하게 펼쳐지는 티베트의 대자연이 압권이었다. 고원 위에 위치한 대형 호수 ‘판공초’와 소금호수 ‘드라바이’ 그리고 검은목 두루미·야크·야생 당나귀 등 희귀 동물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또 3형제가 한 명의 아내와 사는 가정과 보리가루로 만든 ‘짠빠’라는 주식과 ‘버터 차’를 먹는 식습관 등 티베트인의 생활도 보여준다. “티베트인 20% 정도는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1처 다부제죠. 풍요롭지 않은 경제적 상황과 관련 있다고 합니다.” 임PD는 12년 전 조연출로서 비공식적으로 티베트를 취재했으나 중국 당국에 적발돼 녹화 테이프를 뺏긴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중국측의 공식 취재허가가 있었으나 비슷한 위기가 있었다. 그는 “중국 당국이 야생 동물을 찍었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중요한 테이프 3개를 뺏으려 했다”면서 “조연출이 순간적인 기지로 빈 테이프를 당국에 제출해 녹화 테이프를 무사히 가져올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HD 방식으로 찍어서 중국측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죠. 촬영 내내 중국측 감시원 2명이 따라 붙어 인터뷰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임PD는 “중국 정부의 서부대개발 정책으로 티베트 곳곳에서 공사 소리가 들릴 뿐만 아니라 수도 라사에는 초대형 호텔이 들어서는 등 12년 전에 비해 많이 도시화됐다”면서 “지구의 마지막 정신적 성지가 상실되는 느낌이었다”고 아쉬움을 털어놨다. / 경향신문 사진기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림들은 나의 심장 속에 그대로 각인될 것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 구도 수행으로, 방랑과 만행의 이름으로, 그리고 카스트와 가난을 직접 체험하고자 인도, 네팔을 한달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여행 중반, 인도 동북부의 다르질링 어느 티베트 사원 안에 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산업화가 진행 중인 인도의 도시와 농촌, 거대한 힌두 사원 사이를 거닐어 왔습니다. 이제 이곳을 지나 네팔에 들어가면 잠시 히말라야의 품 속에 안겼다가 룸비니를 기점으로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갈 것입니다. 아침 예불시간. 어느 동자승이 따라주는 버터 차의 맛이 일품입니다. 생경한 법구들이 소리를 내고 스님들이 낮은 음정으로 독경을 이어갑니다. 중앙 출입문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제가 몸을 좌우 앞뒤로 흔든 후 호흡을 조절합니다. 마음 속으로 스님들께 신고합니다. 저는 멀리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한국의 청년 불자입니다. 붓다 이래로 전래된 조사선의 가풍이 유일하게 이어져오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그 기개로서 인사드립니다. 단전 앞에다 두 엄지 손가락 끝을 맞붙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문득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억억 하고 소리만 내지 않았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결가부좌는 계속 되고 있었고 스님들의 예불도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희미한 피사체로서 집전 중인 어느 노스님의 눈을 마주치기도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도 두고두고 그 당황스런 눈물의 이유를 곱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간략은 이러했습니다. 인도에 불교는 없다. 단지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도는 우리의 과거 역사를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현재를 살필 수 있도록, 미래까지를 맞이할 수 있도록. 윤회를 혹은 진보를 드넓은 들판에서 홀로 사색할 수 있도록. 인도에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를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지역을 가로지른 교차점 그 어딘가에서 저는 불교를, 승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눈물은 감사와 안도에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불교 혹은 승가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또 세상에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안도하고 안도하는 기쁨의 격정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승가, 그 존재는 여전히 고비사막과 파미르고원을 넘나드는 전법승이 다름 아닐 수 있었습니다. 불교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불법을 만나는 인연 또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삼보는 더없이 소중하였습니다. - 삼보는 두루 편재하고 충만하였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한 대학 교수가 있었다. 그는 미국인이었다. 캘리포니아의 UCLA대학 사회학과 교수였다던가. 어느 날 그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네팔로 관광 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그는 여행 경유지인 인도 북부의 바라나시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의 이야기는 갑자기 끝이 난다. 왜냐하면 존 아무개라는 그 교수는 그곳 바라나시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으니까. 그는 네팔로도 가지 않았고, 미국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사회학도로서 미국에서 보았던 것은 무엇이고 또 바라나시 혹은 사르나트에서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불교를 신앙이나 종교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울릉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관광지 이전의 울릉도란 뱃사람의 옆얼굴에 어려있는 그늘이 대변하는 살기 모진 곳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작은 섬은 놀랍게도 신앙이나 종교가 가득하였습니다. 인류의 자랑스러운 문화, 문명 - 불교. 어쩌면 이미 이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시민운동이지는 않는지. 성찰(self-reflection), 혹은 참선(meditation). 스님들은 그렇게 투쟁하고 계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오늘날 마르쿠제나 하버마스, 송두율 교수에게 불교는 어떤 것일지. 스님들이 왔다가십니다. 산 속에서 아무 말 하지 않던 그 노인네들. 그 사회운동가들은 일장춘몽이라고 친절하게 방편까지 설해주십니다. 차나 한잔 들고 가라고. 치열하게,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