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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9

    말빚, 글빚 - 김회평 (문화일보 3.19)

본문

<오후여담>


말빚, 글빚



말은 쏜살과 같다. 다시 거둬들일 수 없다. 상대의 간곡한 청에, 혹은 호기에 겨워, 아니면 대가를 얻으려 약조하는 건 금방이다. 뒤늦게 수습에 쏟아야 하는 노고는 그 몇 배다. 말은 내뱉는 순간 자신을 떠나 상대의 권리가 된다. 말로 남에게 진 빚, 말빚이다.


글쓰는 일이 생업인 이들에게 말빚은 곧 글빚이다. 마감이 임박해서야 청탁에 응한 자신을, 또 능력이 모자람을 원망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다. 문인, 지식인의 글빚은 세상을 향한 부채의식이기도 하다. 정치인에게 선거는 말빚 잔치다. 상환율은 극히 낮다. 공약은 대개 공약(空約)이 된다. 그러나 후유증은 크다. 세종시 말빚은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다.


때론 말하지 않는 것도 빚이 된다.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 사과와 사죄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이희중, ‘말빚’).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내는 것만큼 해야 할 말을 외면하는 것도 부채가 된다. 가해자, 방관자의 침묵은 또 다른 폭력이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은 말빚을 자주 거론했다. 그가 쓴 글에는 말빚 때문에 전례 없이 결혼식 주례를 맡은 사례, 지인에게 햇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가 결국 말빚을 지고 말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인연과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스님의 면모가 약여하다. 불교신문의 논객이면서 중생의 가슴을 적신 ‘문자승’이기도 했던 그에게 글빚이 번뇌인 적은 없었을까.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원적 직전에 남겼다는 이 한 마디의 해석이 분분했다. 여기서의 말빚은 탈속―세속의 경계에 걸쳐 있다. 스님은 남긴 말과 글이 세상을 어지럽힐까 저어했을지 모른다. 범인 수준으론 짐작하기 어려운 경지다. 그래서 속세의 문법으로는 혼란을 느낀다. 스님은 얼마 전 자신의 저서를 출간해온 출판사들과 장기 계약을 맺었다. 최근까지 신간 출판을 독려했다고도 한다. 생전에 약속을 중시해온 스님을 떠올려보면 계약은 곧 말빚일 터다.


깊은 울림의 말글은 신도와 독자에겐 빚이 아닌 보시였다. 육신은 스러져도 문자는 소멸되지 않는다. 스님의 절판 유지(遺志)가 적잖이 아쉬운 까닭이다.


[[김회평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