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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7

    산승(山僧)의 편지- 현장스님이 법정스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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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山僧)의 편지- 현장스님이 법정스님께



입추가 지나면서 밤으로는 풀벌레소리가 한층 여물어지고, 밤하늘 별자리도 또렷해졌다. 뜰에 내다놓은 돗자리에 누워 별을 쳐다보면서, 별과 달이 없다면 밤이 얼마나 막막하고 삭막할까를 생각했다.

별과 달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한낮의 분주한 활동을 통해서 지치고 메마르고 거칠어진 우리들의 삶을 푸근하게 감싸주고, 안으로 정서와 사유의 뜰을 넓혀주는 일도 한다.

한낮의 더위에 기가 죽어 있던 나무나 풀들도 어둠이 내리면, 숲과 강에서 보내오는 서늘한 바람에 생기를 되찾는다. 낮과 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활동과 휴식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별이 돋고 달이 떠 있는 밤은 우리들 삶의 축복일 뿐 아니라, 허겁지겁 쫓기듯 살아온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 허락된 유한한 세월을 어떻게 소모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한다. 이런 되돌아봄과 반성의 시간이 없다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우리는 인생의 종점을 향해 그저 곤두박질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며칠 전, 올 여름 안거를 한 산중의 선원에서 보내고 있는 현장스님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다래헌(茶來軒) 시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나를 찾아와 입산출가의 뜻을 말했을 때, 송광사의 한 노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라고 소개해 주었었다. 그는 우리 불일암(佛日庵)이 개원되던 날 사미계를 받고 중이 되었다. 그러니 불일암과 함께 그의 수도도 연륜이 쌓여진 셈이다.

그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큰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공부에 대한 감도 잡지 못하고 15년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곁에 계실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처음 맞이한 여름 안거, 축복 속에 두 달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이제까지 모든 삶의 과정들이 금년 여름 안거를 위해서 준비되어 왔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요가난다의 말에 따르면, 구도자에게 첫 번째 축복은 허리를 통해서 온다고 했는데, 그 이치를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 좌선 중 척추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을 느끼면서부터 기쁨과 기운이 솟아납니다. 기쁨과 기운이 넘쳐나니 음식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고, 음식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니 온갖 물질세계와 세속적인 갈망이 녹아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반결제(90일 안거의 절반되는 때)부터 일종식(하루 한기만 먹음; 日中食에서 온 말)을 해오다가 열흘 전부터 단식을 시작했는데 3일 만에 숙변(宿便)이 빠지면서 몸과 마음의 기운이 하나로 통하고, 몸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흰죽만을 하루 반 그릇 정도 4일 간 보식(補食)하고 요즘 다시 일종식으로 살아갑니다. 찬도 김, 버섯, 찌개, 고추 등은 몸이 받아들이지 않고 밥 한 공기 정도와 나물 몇 가지, 국물 조금이면 하루 양식으로 넉넉합니다.

기쁨과 광명의 세계를 흘낏 들여다보고 나니 인간의 양식은 빛과 기쁨임을 알겠습니다. 고요와 기쁨과 광명이 함께하니 피곤함과 졸음과 배고픔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선열위식(禪悅爲食)인가 싶으니 눈물이 한 번씩 솟기도 합니다.>



그는 올 여름 안거 동안 귀한 체험을 하고 있다. 진실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이 거치는 원초적인 체험이다. 먹는 일에 동물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열위식, 즉 선정(禪定)의 기쁨으로 음식을 삼는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과 뼈로 된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 할 때 인간의 양식은 빛과 기쁨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가장 순수하고 맑아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 것은 사랑과 감사의 넘침이다. 현대인에게 눈물이 사라지고 있음은 이 맑고 순수함이 사라져간다는 뜻이고, 사랑과 감사의 염이 고갈되어 있다는 소식이기도 하다.

그의 편지는 계속된다.



<좌선을 위한 좌선, 오로지 좌선에만 전념함(只管打坐), 몸과 마음이 함께 자유로워진(心身脫落), 큰 안락의 법문 등의 이치를 하루하루 체득해 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계율을 깨뜨리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법문에 크게 공감합니다. 충만감과 자비심으로는 계율을 파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수도생활을 기쁨의 길, 축복의 길이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우리 수좌들(선원에서 정진하는 선승들)의 현상을 보면 깨달음과 견성(見性)에 대한 갈망이 도리어 ‘본래부터 열려 있고 지금 넘쳐나는 엄연한 원래의 모습에 눈멀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잠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잠을 이룰 수 없듯이 부처를 구하고 신을 찾는 일이 갈망과 욕구의 응어리가 되어 벽을 만듭니다. 구도자를 인도에서는 산야신(sanyasi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포기한 자’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과 호흡이 가장 조화롭고 자연스러워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지 않을 때 몸과 마음이 사라짐을 보았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싶지만 해제 때까지 잘 지내겠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도원 선사(道元禪師)의 가르침이 가장 확연하게 다가옴을 느낍니다.

이제부터 저는 수도(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수도(修道)생활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제 출가하고, 이제야 불법을 만난 느낌입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면서 선정과 자비를 키워가겠습니다.

해제일에 찾아뵙겠습니다. 법체 청안하심을 빕니다. 삼배>



이 편지를 받고 이튿날 아침 나는 맑은 정신으로 그에게 다음과 같은 회신을 써 보냈다.



<편지 받아 두 번 기쁘게 읽었소. 선열(禪悅)로써 음식을 삼는 것 같아 전해 듣는 마음도 함께 기쁩니다. 몸은 출가했으면서도 마음으로 선정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출가 장부가 될 수 있겠소.

출가수행자는 모든 기존의 틀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세속의 집을 등지고 출가를 했는지 시시로 되돌아본다면, 부질없이 허송세월하면서 꿈속에서 지낼 수가 없을 것이오.

출가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 ‘내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미루면서 허송해 왔는지 내 자신도 이따금 후회합니다. 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꽃처럼 날마다 피어나야 합니다. 가난과 고요와 평안과 정진이 수행자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도원 선사의 법문에 공감한다니 반갑습니다. 본증묘수(本證妙修), 불염오(不染汚)의 정진을 명심하시오.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 닦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밝음(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닦음이고, 닦지 않으면 더럽히니까 항상 정진하는 것이오. 그래서 좌선을 일러 큰 안락의 법문이라고 한 것이오. 휴정(休靜) 선사도 말씀했듯이 자기 자신의 근본인 진심(眞心)을 지키는 것으로써 첫째가 되는 정진을 삼아야 합니다.

한때의 기쁨과 축복의 체험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기 바랍니다. 더 멀리 내다보려면 다시 한층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될 수 있는 한, 말 적게 하고, 잠 덜 자고, 음식 덜 먹는 것이 수도생활을 기쁨과 축복의 길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은 새로운 이해에로 나아가는 자아교육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은 보다 풍요로워지고 더 이상 방황하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진실한 수행은 스스로 발견해 나가는 내밀한 행위이며 눈뜸(開眼)입니다.

올 여름 안거 중에 모처럼 기쁜 소식을 받으니 내게도 기운이 솟는 것 같습니다. 해제의 기쁨을 함께 누립시다. 탈 없이 일념으로 정진하길 바랍니다.>



- 버리고 떠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