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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7

    현장,‘법정스님’을 말하다 (광주드림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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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이만난사람] 현장,‘법정스님’을 말하다

“법정은 돌을 던졌다, 파문은 당신의 몫”


정상철 dreams@gjdream.com

기사 게재일 : 2010-03-16


법정스님, 그는 길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소유의 욕구가 사람 사이를 금 가르고, 편을 나누며, 미움을 만든다. 결국 소유가 모든 번뇌의 시작이자 끝이다. 평생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 것을 타일렀으니, 사람이 가야 할 길 전부가 그의 행적 아래 놓여있다. 법정스님이 저쪽 세상의 문을 열고 아주 가버렸다. 먼 길이다. 떠나고 다비식이 진행되는 동안 슬픔보다 큰 허전함이 세상에 내렸다.


 이제 다시 법정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살아온 과정으로 보여준 진실도 대면할 수 없다. 그 어둠 앞에서 대원사 현장스님은 오히려 편했다. 떠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다. 암세포와의 싸움은 버거운 것이었고, 64kg이던 법정스님의 몸무게는 45kg까지 내려앉았다. 법정은 병상에서 늘 “육신이 거추장스럽다. 빨리 번거로운 거 벗고, 다비장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 죽음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법정스님이 떠나기 이틀 전, 현장스님은 속가의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법정스님을 만났다. 부처의 세상에서 속가의 인연이란 건 사소한 점에 지나지 않지만 아주 무시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법정과 현장스님의 어머니는 고종사촌이다. 현장스님의 어머니가 법정스님에게 “이제 볼 수 없는 거냐?”고 묻자 법정스님이 그랬다. “왜 못 봐, 불일암에 오면 보지.” 현장 스님의 어머니가 다시 “다리 아파 불일암엔 못 올라 가”라고 힐난하자 법정의 마지막 말이 이러했다. “그럼, 길상사로 와.”


 마지막 대화를 엿듣고 있던 현장스님은 저승에서 건너오는 듯한 낮은 음성에서 모든 것을 잠재우는 편안함을 느꼈다. “죽음은 시간과의 작별이고, 차원을 옮겨가는 여행 같은 것이다. 법정스님이 병으로 고통 받던 육신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니 슬퍼할 일은 아니다. 축하해 주는 게 옳다.” 


 법정, 불일암을 짓다


 법정과 현장의 인연은 조금 각별하다. 속가의 인연을 제외하더라도 두 사람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공간이 같다. 목포 정혜원이다. 법정은 당시 목포에 있던 전남상대에 다닐 때 정혜원을 다니며 부처의 세계를 봤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현장도 그곳을 드나들며 출가를 결심했다.


 출가의 뜻을 굳히고 현장이 법정스님을 찾아가 뜻을 구했을 때 법정은 “송광사에 가 있어라”고 했다. 현장은 따랐다. 얼마 후 법정은 서울에서 송광사로 내려 와 불일암을 짓기 시작했다. 그 때가 1975년이다. 송광사 행자였던 현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불일암에 올라갔다. 얼마 동안은 아예 불일암에 들어가 법정스님을 모시기도 했다. 불일암은 법정의 모든 것이 결합된 공간이었다.


 “법정스님은 늘 번잡한 것 피하고, 혼자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시간을 살았다. 음식준비도 스스로 하고, 무엇이든 자기소임의 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법정스님의 그런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곳이 불일암이다. 당신 식대로 설계하고, 당신 식대로 공간을 꾸몄다. 당신이 꿈꾼 생태, 당신이 겨냥한 우주, 당신이 살아온 삶의 철학이 전부 들어앉아 있는 곳이 바로 불일암이다.”


 법정스님에게서 길을 얻었지만 현장은 조금 달랐다. 그는 혼자 깊어지는 정진보다 곁의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부처의 말씀과 가까운 삶이 된다고 믿었다. 세상의 절들이 사람에게서 저만치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이 싫었다. 그가 꿈꾸는 절은 모두가 함께 깨달음을 구하는 공간이었다. 법정스님의 불일암 시절, 그는 ‘문서 포교’의 길을 걸었다. 따지고 보면 다르지만 결국 같은 길이었다.


 현장, ‘해인지’를 만들다


 송광사 생활을 마치고 현장은 법정스님과 헤어져 합천의 해인사에서 5년을 살았다. 그는 거기서 불교학생회를 이끌었다. 함께 고민하고, 같이 방향을 찾아가는 한 방법이었다. 지금은 전국적인 불교잡지로 성장한 ‘해인지’의 시초를 만든 것도 그다. 해인사에서 그는 늘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해인지였다.


 공 들여 취재하고, 공 들여 썼다. 돈이 없어 1부를 100원씩 받고 팔았는데 1만부가 금방 팔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에 4만부를 찍게 됐다. 해인지의 성공은 문서 포교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글에서 희망을 봤다. 모두를 통해 하나를 찾는 길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글은 직접 찾아가서 전해야 하는 말보다 빠르고, 효과 또한 강렬했다.


 현장은 문서 포교의 지형을 넓혀 보기로 했다. 서울로 올라가 ‘불일출판사’를 만든 이유다. 불교와 관련한 서적들을 열정적으로 찍어냈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사유체계였고, 그런 책들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때 불교의 지평 역시 넓어졌다. 따지고 보면 불교는 이 나라의 근원을 이룬 생각이었다. 17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사회와 민족문화 전체에 견고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불교 안에 담긴 그 문화적 힘을 어떤 형태로든 현재적 가치로 회복하고 싶었다. 물론 그 일을 통해 자기 안의 정진도 꿈꿨다.


 “법정스님이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 정갈했다면 나는 번거롭고 복잡하게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방법이란 점에서 결국 같다. 나는 일을 겪으면서 배우는 과정을 거쳤고, 일과 사람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났다. 결국 개인의 집착에서 떨어져 나와 공적인 영역으로 고민을 돌릴 때 일도 이루어진다. 집착 없음이 중심인 걸 이제 안다.” 


 “법정의 마음,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이 살아온 길, 돌아보면 사람이 희망이었다. 법정스님의 다비식을 치르고 돌아와 현장스님은 마지막 말씀을 떠올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생각해 보면 법정스님은 마지막 말씀처럼 제 것의 전부를 내줬던 사람이다.


 “법정스님은 금생에서 저지른 죄가 없다. 오히려 평소 당신의 말씀대로 전생에서 저지른 죄를 이번 생에서 모두 갚고 떠났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10원짜리 하나 내놓지 않는 양반이 어려운 학생들에겐 다 내줬다. 인연이 되면 한 번이 아니라 대학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모두 내줬다. 종교나 생각도 따지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냥 줬다.”


 법정스님의 삶은 아름다웠다. 그가 펴낸 책들의 막대한 판매량이 증명한다. 법정의 순정한 삶은 맑고, 단아하고, 깊고, 여백이 넓은 문장을 통해 사람들과 만났다. 법정의 글 앞에 부끄럽지 않았던 자, 세상에 없었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한 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법정의 글에 그토록 매료됐을까? 현장스님은 “자기 문제를 보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글로 읽히기보다 약의 느낌이 강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람이 살면서 몸에 쌓았던 욕심과 탐욕, 질투 같은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처방전 같은 삶의 철학이 법정스님의 글 속에는 담겨 있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글은 한 번 보고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플 때마다 꺼내 보게 한다. 많이 읽히는 법정스님의 글이 증명한다. 모든 사람은 법정스님처럼 살고 싶어하는 내적 욕구가 있다. 다 내려놓고 편안해지고 싶은 것이다. 다만 생각은 쉽고, 행하기 어렵다. 법정스님은 스스로의 삶으로 돌을 던졌고, 파문을 일으키는 건 당신의 몫이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35mm@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