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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7

    법정 스님과 인혁당 사건 -김효순 (한겨레신문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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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인혁당 사건


며칠 전 타계한 대중음악 작곡가 박춘석씨가 ‘비내리는 호남선’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의 부음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유세과정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급사한 후 그를 애도하는 서민들 사이에 널리 불렸던 노래다. 내 기억으로는 60년대와 70년대 이미자, 패티김, 남진의 히트곡을 양산한 사람이 자유당 시절의 비내리는 호남선과 중첩된다는 것이 어딘가 이상했다. 연보를 보니 25살의 젊은 나이에 그 곡을 작곡한 것으로 나와 있다.


지난해 말 독립운동사의 대가인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조 교수는 50년대 중반 경북대 재학 시절을 회고하면서 “5월5일 해공 신익희가 갑자기 작고해 민주당 쪽 대열이 흩어졌는데 해공이 숨지지 않았더라면 당선됐을 텐데”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이분은 그 날짜까지 기억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상황은 내가 어릴 때라 아무런 기억이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동시대인으로 직접 체험했느냐의 여부가 기억의 강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지난주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 평소 무소유를 설파했던 대로 그의 마지막 길은 아주 검소하게 치러졌지만, 그 어떤 장엄한 장례식보다도 일반 대중에게 큰 울림을 남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욕의 허망, 나눔,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서 그가 보인 선도적 실천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불교신문> 주필과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으로 문필활동을 하던 법정 스님이 전남 순천 송광사에 다시 내려간 것은 75년이다. 입적한 다음날치 <한국일보> 기사에는 그해 봄 인혁당 사건 관련자의 사형집행이 ‘결정적’이었다고 돼 있다. <연합뉴스>와 <경향신문> <한겨레>에도 비슷한 해설이 실려 있다. 하지만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기사에는 인혁당 사건 관련 언급이 전혀 없다. 70년대 초반 불교계에서는 외롭게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그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엄격한 수도생활에 들어간 뜻을 어느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중동으로 불리는 신문들이 인혁당 사건을 뺀 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조중동이 세종시 이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 4대강 사업, 과거사 청산 등의 주요 쟁점에서 보수적 공동보조를 취해 온 것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만, 법정 관련 보도마저 그렇게 된 것은 희한하다. 총무원 자료에도 나온 부분이라고 하니 일부러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대사의 일부라고 해도 기억에 담으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 한 금방 풍화하는 것이 세상 굴러가는 이치다. 법정 스님이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인혁당 사건은 75년 4월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기각 판결이 나온 다음날 처형된 것을 말한다. 정보기관에 연행된 이후 단 한번도 가족들과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은 채 극형이 집행됐다. 노무현 정권 시절 과거사 관련 위원회에서 한 심의위원이 실무자를 나무라는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대학교수였던 그는 군법회의 재판기록이 참고자료로 올라온 것을 보고 자료준비를 똑바로 하라고 지적했다. 심의위원으로 위촉된 인사조차 인혁당 사건을 포함한 긴급조치 1·4호 위반자가 민간법정이 아니라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재심 과정에서도 유사한 정황들이 되풀이됐다고 한다. 긴급조치에 의해 설치된 비상군법회의의 재판이 당시 어떻게 진행됐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법관이 적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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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