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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5-31

    법정스님, 여동생·빠삐용 의자·거액의 인세… - 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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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여동생·빠삐용 의자·거액의 인세…


뉴시스| 기사입력 2010-04-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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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법정스님의 저서 절판 문제는 스님의 마음을 헤아려야지 단순히 말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지난달 입적한 법정(1932~2010) 스님의 일생을 그린 소설 ‘무소유’를 펴낸 작가 정찬주(57)씨는 26일 “스님의 말씀이 떨어진 자리, 즉 낙천 자리를 잘 살펴야 한다”고 귀띔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스님의 글을 지식의 대상으로 여기고 표면에만 얽매여 있다”며 “오히려 스님은 좋은 말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당신의 책을 징검다리로 삼아 침묵하면서 지혜를 얻어라. 왜 좋은 말만 좇느냐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스님의 입장에서는 좋은 말을 남긴 것도 일종의 업 또는 빚”이라며 “그래서 말빚을 지지 않기 위해 절판을 말씀한 것인데 스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다”고 짚었다. “스님이 남긴 말씀은 일종의 사자후 같은 것이었다”며 “스님의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이 떨어진 자리를 잘 살펴야 한다”고 일렀다.


지난달 17일 법정의 유지를 받드는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출간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법정의 유언장을 공개하면서 절판 문제가 불거졌다. 이후 각 출판사 측과 협의 끝에 절판에 합의, 법정의 49재인 28일까지 새 인지를 발급하는 것으로 문제는 일단락된 상태다.


정씨는 법정의 손때가 묻은 ‘선학의 황금시대’ 등 6권을 ‘신문배달 소년’ 강모(49)씨에게 전달한 것도 법정의 말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여겼다. “스님이 대학 3학년 때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며 “남 몰래 고학생을 도운 것은 그런 연민이 있어서”라고 짐작했다.


“책을 ‘나에게 신문 배달한 사람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책을 나눠줘서 희망과 용기를 주라는 뜻”이라며 “내가 만약 3자였다면 그 소년을 찾지 않고 다른 고학생들에게 책을 나눠줬을 것”이라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나눠주라는 것이 법정 스님의 참된 뜻이라 생각한다.”


정씨는 1984년부터 출판사 샘터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법정의 책 10여 권을 만든 인연으로 계를 받고 재가 제자가 됐다. 법정에게서 ‘세상에서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도 받았다.


책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은 채 정씨만이 알고 있던 법정의 일화가 여럿 담겼다. 덕조·덕현 등 상좌 스님들은 감수하고 추천사를 썼다. 법정 추모 열기에 동반, 여러 종이 나왔지만 이 책이 달라보이는 까닭이다. 특히, 평소 글에서 언급하지 않던 여동생 부분이 눈길을 끈다.


정씨는 “청년 시절의 스님은 여동생이 생기기 이전의 어머니만을 ‘어머니’로서 인정했다”며 “스님이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스님이 고등학생이던 때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여동생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거리가 생기게 됐고 여동생에게도 정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출가한 이후에도 스님은 이것을 늘 부끄러워했다”며 “특히 여동생에게 한 번도 살갑게 정을 주지 못한 것을 늘 마음에 뒀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스님은 강원도 오두막 방에 한동안 화가 박항률이 그린 ‘봉순이’ 그림을 걸어놓고 그리울 때마다 바라보곤 했다”며 “여동생 또래의 처녀에게는 탁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탈박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정씨는 “단성사에서 함께 영화 ‘서편제’를 보는 중에 스님이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자꾸 눈물을 훔쳤다”며 “오누이가 나오는 영화였기에 더 각별하게 봤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법정은 입적 즈음에 이르러 “꿋꿋하게 살라”면서 여동생을 친견하고 보듬어 안았다.


정씨는 “전남 송광사 불일암 시절 스님은 서울에 나올 때 조조 영화를 즐겨 봤다”며 “영화를 좋아한 스님은 손수 만든 의자에 ‘빠삐용 의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말씀했다”면서 “그 의자에 앉아 당신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는 거야라고 말씀하더라”며 웃었다.


가난하던 법정은 ‘무소유’ 등 자신의 저서를 통해 상당한 인세를 얻었지만 그 많은 수입을 ‘소유’하지 않았다.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남몰래 나눠준 것이다. 학생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다. “학생이 부끄러워할까봐 그랬다고 하더라. 그렇게 배려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비밀은 1993년 금융실명제로 인해 드러났다. 정씨는 “당시 스님에게 엄청난 세금이 부여됐다”며 “금융실명제가 아니었으면 스님이 그런 선을 행한 줄도 모를 뻔했다”고 껄껄거렸다. “스님은 ‘베푼다’는 말을 싫어했다”며 “내 것이 없는데 어떻게 베푸느냐”는 것이다. “단, 잠시 맡았다가 돌려주는 것이니 나눈다는 말을 사용하길 원했다.”


책은 법정이 1970년대 민주·반독재 운동을 한 심리적 배경도 풀어놓는다. “스님이 보통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인 행세를 하며 조선말을 못 쓰게 하던 조선인 교사를 비아냥거렸다가 잔인하게 맞은 적이 있다”며 “당시 교사는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벗어 피가 터지도록 스님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고 알렸다. “당시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처럼 폭력에 대한 저항의식 싹 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법정은 사회적인 언급을 꺼리게 된다. 정씨는 “당시 스님은 수행자는 병든 가지를 건강하게 만드는 사람이지 증오나 적개심을 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봤다. “어느날 당신 안에 적개심과 증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후 수행자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불임암에 내려 갔고 이후가 스님의 최고 수행기간이 됐다.”


정씨는 “선방의 울타리를 벗어나 당신 방식으로 선승이 나아갈 길을 보여줬다”며 “절대 남을 흉내내내지 않는 분”이라고 법정을 요약했다. “불교의 교전은 석가모니지만 이 세상의 석가모니는 한 분으로 족하다며 그 자신이 또 다른 석가모니가 돼야 한다고 말씀했다.”


정씨는 이번 소설에서 법정의 인간적인 면에 중점을 뒀다. “드라마틱하게 사건 위주로 글을 전개시키기 보다는 에세이 풍으로 써내려갔다”며 “파스텔 톤으로 스님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나갔다”고 밝혔다. “언젠가 스님의 말씀을 글로 한 번 정리해보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가만히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아마 기특해 하실 것 같습니다.” 323쪽, 1만5000원, 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