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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8-10

    향원익청(香遠益淸) (1) - 황인용 (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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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익청(香遠益淸)


황인용 (수필가ㆍ한글+漢字문화 지도위원)


수연(水然) 선생님!


법정 큰스님의 열반소식에 누구보다 먼저 떠오른 분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일찍이 불일암으로 큰스님을 찾아가서 3일이나 묵은 일이 있었다고 하셨지요. 큰스님께서 가공의 인물로 창조한 수연스님의 인간성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아호로 쓰기를 청하자 기꺼이 응낙하셨다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선생님의 아호를 지어주신 셈입니다. 선생님은 대표작이 ‘관세음보살상에게’일 정도로 불교친화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오셨습니다. 여러모로 큰스님과 선생님은 전생의 인연이 깊었던 모양입니다.


이 점은 선생님과 저의 인연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지요? 저도 젊은 시절 출가를 결심한 적이 있었을만큼 불교친화적인 데다가 선생님이 도반으로 삼고 계시는 소나무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양 우러르는 시인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과 저는 띠동갑인데가 풍류도라는 결정적인 공통분모가 있었군요. 선생님은 언제나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시고 또 구름같은 구렛나루를 표표히 날리는 이 땅의 풍류도인이십니다. 그야말로 풍류도에 관해서라면 독보적인 국보급 시인이신거지요. 저도 풍류도라면 오랫동안 자료를 모아왔고 ‘풍류도의 축복’을 ‘수필과 비평’에 연재했지요. 그러한 연유로 지금은 미국의 ‘코리아 모니터’에 ‘한국의 풍류’를 연재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 또한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간접적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랄까요?


‘맑고 향기롭게’ 운동은 상징 도안으로 삼은 연꽃의 미덕을 표방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맑고 향기롭게는 소나무의 미덕을 표상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습니다. 송뢰(松籟) 그 얼마나 그윽하게 맑고 향기롭던가요? 심신을 쇄락(灑落)하게 해주는 공덕에서는 따를 자가 없을 터입니다. 선생님께서 작금 소나무에 관한 시를 집중적으로 쓰고 계심도 그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연꽃의 향기는 멀리까지 퍼지기도 하려니와 게다가 더욱이 맑기까지 하다.”(香遠益淸)


주돈이(周敦頤)는 회심의 애련설(愛蓮說)에서 이렇게 연꽃의 미덕을 극찬했습니다. 이 말은 소나무에 대한 칭찬이라고 해도 하등의 허물이 없겠지요. 주돈이가 향원익청을 말했음은 “군자의 아름다운 덕행은 맑은 연꽃의 향기와 같아서 후세에까지 멀리 미친다.”는 의미였습니다. 큰스님의 아름다운 덕행도 세상의 어느 연꽃으로도 비할 수 없이 향기로와서 영원히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이 탁하고 악취로 진동할수록 큰스님의 유향(遺香)이 간절히 그리워지겠지요. 반면에 큰스님이 꿈에도 염원하셨던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큰스님의 향기를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순(堯舜)같은 천하태평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임금의 존재조차 모른다는 말에 있지 않던가요?


여기서 우리는 모순(矛盾)의 역설에 봉착한 셈입니다. 큰스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세상이 여전히 탁하기를 바랄 것인가, 아니면 큰스님을 잊어도 좋으니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바랄 것인가? 더 이상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큰스님의 유언도 역시 갈등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하느니 큰스님의 책들이니 말입니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라는 대의명분을 따르자니 대의명분을 저버려야 하는 진퇴양난도 병 속의 새를 꺼내는 화도가 아니겠습니까?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맑고 고요함은 천하의 바른 길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시끄러움은 결국 세상사람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요즘처럼 불화하고 경박하고 혼탁하고 시끄러운 세상일수록 석간수(石間水)처럼 청정한 큰스님의 말씀에 갈증을 느낌은 중생들의 너무나도 간절한 욕구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저는 간절한 심정으로 큰스님께 빌고 싶습니다.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당신의 유언은 잠시 거두어주십사 하고 말입니다. 당신 자신의 말의 빚을 거두는 일은 가볍고 중생의 고통을 위로하는 일은 막중하기 때문임은 물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발원을 세운다면 큰스님도 기꺼이 응낙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극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글을 한창 쓰고 있는데 17층 아파트 창가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참으로 명랑한 음성으로 울었습니다. 하도 눈부신 목청이어서 기쁜 새 봄의 소식을 알려주는 길상(吉祥)의 조짐 같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큰스님의 생전 말씀을 무량한 감회 속에서 반추함도 이처럼 신선한 충만감에 넘치는 기쁨이라면 얼마나 축복받는 일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