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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4-03

    무소유라는 시대의 화두를 남기다 - 원철스님 (중앙일보 4.3)

본문

[마음산책] '무소유'라는 시대의 화두를 남기다


해인사 다녀오는 길에 교통체증으로 덜 막히는 방향을 찾다 보니 성북동 길을 통해 조계사로 오게 됐다. 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길상사 앞을 지날 때는 저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은 비좁았다. 법정(法頂·1932~2010) 스님께서 던진 ‘무소유’라는 시대적 화두에 모두가 공감한 때문에 그 여운이 사십구재(四十九齋) 기간과 겹쳐 여전히 많은 추모객의 발걸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열반(涅槃)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어른스님들 틈에 끼여 문상을 갔다. 가사를 이불처럼 덮고 고요한 표정의 얼굴만 내놓은 채 행지당(行持堂)에 누워 계시던 마지막 모습이 실루엣처럼 떠올랐다. 그 탓인지 올봄엔 유난히도 봄눈이 잦다. 봄꽃은 화려하게 피어나는데 춘설(春雪)이 그 위에 흐드러지게 쏟아지니 자연도 생멸(生滅)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십대 학인(學人) 시절에 해인사 강원(講院)의 교지(校誌) 편집 일을 맡았을 때 다짜고짜 스님의 명성만을 좇아 불일암(佛日庵)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이 당신과의 첫 만남이었다. 아무 약속도 없이 쳐들어오다시피 한 새내기에게 찾아온 이유조차 묻지도 않고 툇마루에 앉게 한 후 차를 주시며 ‘승려 노릇 잘하라’며 이런저런 말씀을 주셨다. 결국 본래 목적인 원고는 받아오지 못했지만 ‘문학소년(?)’에겐 만남 그 자체로 충분히 행복했다. 유명세 때문에 바쁜 스님께 ‘우리끼리만 읽는’ 이름도 없는 정기간행물의 수필 코너에 여러 필자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청탁을 하러 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등줄기에 땀이 흐를 결례를 범한 것이었다. 뭘 몰라도 한참 몰랐으니 가능했던 치기였다. 하지만 그 인연으로 당신의 열렬한 글 팬이 되었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마지막 마무리』 책까지 구입해 읽었다.


그림=김회룡 기자


당신은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젊은 시절 십여 년을 해인사에서 보냈다. 어느 날 장경각을 참배하고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는데 시골 아주머니가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고 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더니 시답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 빨래판같이 생긴 것 말이에요?”라고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경판은 한문글자를 가지런히 규칙적으로 양각으로 새겨놓은 탓에 표면의 요철로 인해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기에 적격이었다. 게다가 크기까지 적당했다. 문무대왕 비석의 일부도 글자가 새겨진 까닭으로 인해 여염집 우물가에서 한동안 빨래판으로 사용되었다. 10여 년 전에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서 제자리에 갖다 놓은 일도 있었으니 ‘국보 빨래판’ 사건은 이래저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인해 법정 스님은 ‘소통 언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서 교과서적인 ‘도인의 길’을 포기하고 한문 경전의 한글 번역과 함께 대중언어를 사용한 글쓰기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한 수행자의 평생 노선이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한 동기로 정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만난 성철 스님은 해인사를 떠난 이후에도 인연은 계속 이어졌고, 몇 년에 한 번씩 찾아뵙곤 했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두 스님 모두 성격이 유별나고 또 다소 괴팍스러운 구석이 있는지라 서로 잘 맞았을 것 같다. 어느 해 여름, 법정 스님은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삼천 배라는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대학생 불교연합회 수련팀을 보고서 내심 못마땅했는지 ‘굴신(屈身)운동’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를 전해들은 어느 다혈질 스님이 “그러면 염불은 입 개폐(開閉)운동입니까?”라는 명언으로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오기도 한다.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이 늘 ‘밥값 했다’고 자부한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도 법정 스님의 손길로 마무리된 책이다. 1980년대 당시 시자(侍者)였던 원택 스님이 초고를 들고서 불일암을 찾았다. 한글 윤문(潤文)을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당신의 윤문 원칙인 ‘토씨 한 개라도 저자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서로 머리를 맞대고서 조심스럽게 최소한 손질만 해나갔다. 며칠 동안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암자는 이미 ‘문학도의 성지’가 된 곳이라 매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통에 일의 흐름이 자꾸만 끊겼다. 물론 당신도 나름대로 접대 방법을 동원하면서 작업에 몰두하고자 노력했다. 그 방에는 봉창문이 있었는데 그 문만 살짝 열고 얼굴만 보여주며 “현품 대조 됐소” 하고는 에둘러 돌려보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해인 수녀님이 올린 추모편지에서 ‘만난 지 오래됐다’는 의미로 사용한 ‘현품 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는 문장은 그 표현의 기발함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두 어른이 역주와 윤문의 직책을 맡은 덕분에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종로 보신각 인근의 평화당 인쇄소에서 초판본이 나왔다. 뜨끈뜨끈한 책을 의기양양하게 들고 가서 스승에게 자랑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교정하고 윤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자(誤字)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게 책이가?”라고 하면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시자는 볼멘소리로 법정 스님께 전화로 하소연했다. 그 말을 듣고서 “그러니까 활자(活字) 아닌가, 이 사람아”라고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더불어 3쇄 정도는 찍어야 제대로 교정이 끝나더라는 개인적 경험담을 전해주면서 의기소침한 시자를 달래주었다.


그 책으로 성철 스님은 “따로 인사를 해야겠다”고 할 만큼 법정 스님의 그 공로를 높이 평했다고 한다. 두 분의 인연은 이래저래 오랜 세월 예사롭지 않았다. 성철 스님이 입적한 몇 년 후, 사진 모음인 『포영집』 간행 때도 법정 스님은 서문을 통해 두 분 간에 아련한 추억의 여백까지 함께 기록으로 남겨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다.


“당신(성철)이 입으려고 챙겨둔 무명옷 한 벌을 주면서 내(법정) 성미에 맞게 행건(行巾 )까지 챙겨주었다. 그 옷을 기워가면서 오랫동안 잘 입었다.”


원철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그림=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