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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25

    나는 시간과 공간을 버렸다 - 성전스님 (불교신문 3.24)

본문

성전스님 / “나는 시간과 공간을 버렸다”

성전스님 / 논설위원.남해 용문사 주지


법정스님이 열반하셨다. 스님은 시간과 공간을 이제 버려야겠다고 하셨다. 시간과 공간이란 형상이 있는 것들에게는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형상이 있다면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형상을 가지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비움을 외면한다. 형상 있는 것의 본질은 집착이기 때문이다. 형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집착보다 버리기에 익숙한 사람은 형상을 지니고 있으나 형상의 지배를 떠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아름답다. 누구나 다 더 가지려 하고 더 쌓으려고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비우고 스스로 버리는 삶의 모습은 쫓고 싶은 하나의 전형이 된다. 스님은 살아 이미 형상의 집착을 벗어나 있었음으로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무여열반’을 이룬 셈

떠나는 순간 의연함은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한 생애를 모두 다 빼앗기는 순간에 그 누가 의연할 수 있겠는가. 사실 육신보다 우리에게 큰 배반감을 안겨 주는 것이 없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또 육신의 장수를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육신에 공을 들였던가. 죽음은 그런 육신이 일순간 나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 순간 과연 그 누가 의연할 수가 있겠는가. 적어도 살아서 형상의 무상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서 결코 의연할 수가 없다. 존재의 본질이 무상하고 내가 없고 고통이라고 말할 수는 있더라도 그것을 온 몸으로 보이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것을 온 몸으로 보이셨다. 살아서 그는 유여의 열반을 이루었고 임종의 순간 그는 무여의 열반을 이룬 셈이다. 시간과 공간을 이제 버려야겠다는 한 말씀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

무아는, 열반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삶 속에서 매 순간 실현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무아적인 삶의 태도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무아를 성취할 수 있겠으며 살아 마음의 번뇌 없음을 구가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열반을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 경직 되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무아나 무소유는 그리고 열반은 너무 먼 이야기가 아닌가. 무아를, 열반을 아주 먼 훗날이 되어야 만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님의 이 한 말씀은 차디찬 경종으로 다가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상을 지니고 있으나 이미 형상을 떠난 사람에게 무소유의 삶의 태도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님은 그래서 의연하다. 바람이 떠난다고 울먹이고 물길이 흐른다고 어디 주저하더냐. 공포도 없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스님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고 말씀하시고 길을 떠나신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떠가는 구름처럼 스님은 다시 운수납자가 되어 저 영원한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맑은 수행자 법정스님

스님 열반하시기 전 나는 스님을 단지 글을 쓰는 스님으로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열반의 모습에서 스님이 얼마나 맑은 수행자였는가를 비로소 느낀다. 스님의 글의 맑음이 그리고 그 울림이 살아있는 수행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스님은 아름다운 수행자였다. 그 말씀은 모두 아름다운 수행의 샘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마른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나무 평상에 가사만 두르고 스님은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밤새 불길이 되어 타오르며 그는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글 하나를 썼다. 나는 흐르는 물을 보게 되면, 스치는 바람을 만나게 되면 아주 오랫동안 그 글을 읽게 될 것만 같다.


[불교신문 2608호/ 3월24일자]

2010-03-20 오전 9:11:18 /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