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성 보듯 북한을 보라
물난리 후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녘 동포들, 국제사회는 심각성 경고하는데 정부는 요지부동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눈 감고 귀 막아도 아픔은 그대로다’. 유니세프는 북녘 아이들의 73%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1997년 사진.
“쌀밥을 먹다가 식량이 부족해지면 옥수수와 쌀을 반반씩 섞어 먹는다. 그러다 옥수수밥을 3끼 먹게 되고, 더 어려워지면 2끼로 줄인다. 상황이 계속 나빠지면 옥수수죽을 먹기 시작한다. 그마저 떨어지면 풀죽으로 끼니를 때우기에 이른다. 영양실조가 심각하게 번지는 건 이즈음이다. 옥수수겨로 만든 묵지가루로 죽을 쑤는 게 그 다음 차례다. 이쯤 되면 서서히 굶어죽는다는 말이 나온다.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거친 음식을 먹다 보니, 주로 소화불량이나 배변불량, 장파열 등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논의 벼뿌리를 말려서 갈아 죽을 쑤거나 산으로 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쑤는 게 그 다음 단계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굶어죽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난 과정은 대체로 이렇게 흘러갔다.”
“옥수수죽에서 풀죽 단계로 넘어가”
사단법인 ‘좋은벗들’ 이사장 법륜 스님은 지난 5월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금 북한의 식량 사정은 옥수수죽을 먹는 단계를 넘어 풀죽을 먹는 단계로 다가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언제부턴가 해마다 이맘때면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돕자’는 말이 나온다. 벌써 몇 년째 “올해가 고비”라느니 “대량 아사 사태가 재발될 수 있다”는 말이 되풀이돼왔다. 그래서다. 조금씩 무뎌졌다. 이를테면 “배고픈 건 다 아는 얘기고, 그보다 조금 더 배가 고플 수 있다”는 말 정도로 여기게 됐다. 올 초 ‘북한 식량난’ 얘기가 다시 나올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올해 북한 식량 사정은 예년에 비해 얼마나 더 나쁜 걸까?
‘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차드·소말리아·수단·짐바브웨.’ 지난해 12월 세계식량계획(WFP)은 이들 6개 나라를 2008년 한 해 동안 지구촌이 지원을 집중해야 할 ‘7대 핵심국가’로 꼽았다. 나머지 한 나라는, 북한이었다. WFP는 지난 4월16일 자료를 내어 “북한의 식량난이 올해 ‘인도적 재난’으로 번질 수 있다”고 새삼 경고했다. 이 단체 토니 밴버리 아시아 담당국장은 성명에서 “지난해 8월 물난리로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급격이 떨어졌음이 확인됐다”며 “북한의 식량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으며, 끔찍한 비극을 막기 위해 외부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밴버리 국장은 “현 상황이 이어질 경우 650만여 명의 북한 주민이 식량난에 시달리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눈 감고 귀 막아도 아픔은 그대로다’. 유니세프는 북녘 아이들의 73%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2002년 사진.(사진/ AP연합)
장 피에르 마르게리 WFP 평양사무소장은 ‘곡물가격 폭등’에 주목한다. 그는 같은 자료에서 “실질 곡물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올해 북한 주민들은 예년보다 훨씬 심각하고 광범위한 굶주림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WFP가 내놓은 통계치를 보면, 지난해 4월 1kg에 700~900원 수준이던 장마당 쌀값이 올 4월 2천원 이상까지 폭등했다. 주식이나 다름없는 옥수수값도 1년 전 kg당 350원가량 하던 것이 600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는 “2004년 이래 가장 비싼 가격”이란 게 WFP의 지적이다.
이에 앞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내놓은 ‘2007년 북한 식량 생산량’ 관련 자료도 우려를 키운다. FAO는 북한 당국이 공개한 통계자료를 기초로 지난해 북한에서 생산된 곡물의 총량이 약 300만t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2006년 대비 25%가량 줄어든 수치로, 여름 가뭄이 극심했던 지난 2001년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이에 따라 FAO는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량은 약 165만t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지난해보다 식량 부족량이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은 북한 어린이의 37%가량이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며, 산모 3명 중 1명이 영양실조와 빈혈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 식량지원은 ‘춘궁기’ 지나서야 도착
‘불능화’ 단계에서 핵시설 신고 문제를 두고 교착상태에서 빠졌던 북핵 문제가 돌파구를 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북한 당국이 핵시설 관련 자료를 내놓으면서 미 정부는 국무부에 딸린 국제개발처(USAID)를 통해 앞으로 1년간 50만t의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지난 5월16일 밝혔다. 미국 정부의 발빠른 지원 약속은 북한 당국이 미국이 정한 기준에 맞게 식량 분배·감시 절차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식량 분배·감시 절차 문제로 그동안 여러 차례 외부 지원을 거부하기까지 했던 북한으로선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급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워싱턴에서 지원 약속이 발표된 지 불과 10여 시간 만에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은 “미국 정부의 식량 제공은 부족되는 식량 해결에 일정하게 도움이 될 것이며, 두 나라 주민들 사이의 이해와 신뢰 증진에 기여할 것”이란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 ‘눈 감고 귀 막아도 아픔은 그대로다’. 폭우로 집을 잃은 북녘 동포들이 지난해 8월 평양 교외의 간이 대피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평양/AP 연합)
문제는 ‘시간’이다.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마커스 놀런드 선임연구원과 스티븐 해거드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지난 5월17일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50만t 식량지원도 임박한 북한의 식량위기를 풀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식량이 ‘제때’ 북한에 도착하기 어려운 탓이다. 미 국내법에 따라 해외 식량지원은 미국산 곡물을 사서 미국 선적의 배에 실어 보내야 한다. 두어 달은 족히 걸리는 일이다. 게다가 65명에 이르는 식량분배 모니터요원을 훈련시키고 배치해야 한다. “미국의 원조식량이 북한 주민들의 손에 쥐어지는 건 일러야 7~8월께”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비축 식량이 바닥을 드러낸 지는 이미 오래다. 장마당에서도 낟알이 사라지고 있다. 평양에서조차 식량배급이 들쑥날쑥이고, 먹을거리가 떨어져 학교에 가는 대신 부모의 손을 잡고 구걸에 나서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탈영하는 병사들까지 나오고 있단다. ‘춘궁기’에 깊숙이 빠져든 게다. 미국의 식량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두어 달을 북녘 동포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 ‘눈 감고 귀 막아도 아픔은 그대로다’. 2006년에 이어 2007년에도 수마가 북녘 땅을 할퀴고 지나갔다. (사진/ REUTERS/ KOREA NEWS SERVICE)
△ ‘눈 감고 귀 막아도 아픔은 그대로다’. 법륜 스님(사단법인 ‘좋은벗들’ 이사장)이 지난 5월26일 북한 식량난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현재 북쪽에서 식량난이 극심한 지역은 지난해 여름 물난리 피해지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수재 복구가 제대로 안 된데다, 곡물가격마저 급등했다. 춘궁기만 넘으면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버텨낼 수 있다.” 강영식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은 “미국의 식량지원 물량이 도착할 때까지 6~7월 춘궁기를 넘기기 위해선 20만t가량의 긴급지원이 필요하다”며 “민간 모금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부 “긴급지원할 정도 아니다”
실제로 ‘긴급지원’은 우리 정부만이 할 수 있다. 식량지원의 양보다 속도가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나진·청진·단천·신포·흥남·원주·해주 등 5천t급 이상 선박의 정박이 가능한 모든 항구를 열어 식량을 최대한 빨리 여러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이미 연결을 마친 경의선을 통해 ‘식량열차’를 운행하는 것은 그 상징성과 의미 또한 클 것이다. 급하다면 트럭을 동원해서라도 실어보내야 한다고 대북 인도 지원 단체들은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북쪽의 지원 요청 없이는 먼저 인도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5월26일 기자들과 만나 “현재로선 (북한의 식량 사정이) 긴급지원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 때도 당시 김영삼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에 머뭇거렸고, 줄잡아 100만 명이 넘는 북녘 동포들이 차례로 굶어 죽었다. 사이클론이 휩쓸고 간 버마도, 대지진이 강타한 중국도 돕는다. 굶주림에 스러져가는 동포를 보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려울 때 먼저 손을 내밀면 어색해진 관계도 쉬이 회복된다. 그게 바로 실용이다.
북한 주민 육성 증언
“이미 굶어 죽고 있다 말입니다”
“황해남도 해주 같은 데는 지금 현실적으로 로동자들은 배급이 전혀 없다 말입니다. 주변 농촌들에서는 쓰러지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온다 말이에요. 이 사람들 작년부터 분배(배급)를 준 거는 두 달분 내지 석 달분밖에 안 줬다 말입니다. 어떤 리는 한 달분도 안 줬단 얘기지. 그래서 농장원들이 안 나온다 말입니다. 농장원들은 장사 기술이 없으니까 장사를 못하니, 그 전에 있던 걸로 먹다가 지금은 굶어죽는 것도 갔다온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서 말하더라 말이에요. 고저 한 개 리에서 10세대는 넘어 나옵디다. 아들도 죽고, 대체로 쉰 살 벗어진(넘긴) 사람들이 기력이 빠지다 보니 사망되고….”
최근 북한 식량 사정에 대한 내부 증언이 공개됐다. 사단법인 ‘좋은벗들’은 지난 5월26일 서울 종로구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2008년 북한사회 동향보고회’에서 올 들어 북한 내부와 북-중 국경지대에서 채록해온 북녘 동포 3명의 육성 증언 화면을 공개했다. 이미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화면 속에서 연방 담배를 피워물던 ‘지방간부’라는 한 남성의 증언은 이렇게 이어졌다.
“제일 굶어죽는 게 많은 곳은 황해도 지역에서 나오고, 함남도 지역에서도 함주, 정평, 사포구역 이쪽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온다 말입니다. 이 상태로 가면 6월 중순, 말쯤 되면 굶어죽었다는 게 노랫소리처럼 나오지요 뭐. …바쁜(힘든) 기가 어느 때 제일 바빠하냐면 햇강냉이가 나와서 강냉이를 먹고 새 강냉이를 말려서 먹을 때 그 전에 제일 바빠한다 말입니다. 보릿고개보다 그때 제일 바빠한다 말입니다. 그때는 모든 식량이 다 떨어질 때라 말입니다.”
‘평양의 한 중간간부’는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고개를 숙였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이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알려진 것이 사실인데, 근데 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처럼 아파트 골목골목마다 아이들이 눈만 껌뻑껌뻑 뜨고 있는 그런 판국은 아닙니다. 근데 이미 죽고 하는 것이 지방들마다 한두 명씩 나온다지 않습니까. 이건 사실이고. (정말) 굶어죽었다는 게 아니고 간단한 병에도 그만 이기지 못해서, 결국 먹지 못해서 면역이 약해서 죽은 겁니다.”
평양의 사정은 그나마 나을까? ‘중간간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년 초부터 평양시만은 배급보장에 대한 국방위원회 명령이라면 어떨는지, 그런 말씀이 3차, 4차에 걸쳐 있었습니다. 안간힘을 써서라도 한두 차는 보장했는데 역시 보장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만 봐도 얼마나 낟알이 긴장한가(부족한가) 알 겁니다. …평남도, 황해도, 함흥 정도부터는 정말 한심합니다, 한심합니다. 아마 전 조선 상황이 다 같습니다. 그 형편에 이러냐 저러냐 묻기에 앞서 정말 급합니다. 이것밖에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한가요.”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의 18살 처녀는 화면 속에서 울먹였다. “대부분 어머니들은 아무래도 제 자식을 진짜 떼간다(데려간다) 하면 다 좋아할 부모들은 없잖습니까. 말로는 그래도, 중국 가서 너네라도 잘살면 바랄 게 없다고 그렇게 말한다 말입니다. 여기서는 살아야 뻔하다 죽을 때까지,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잘 살 날은 없다. 그래서 가라가라, 그 말을 들으면 서운하죠. 그래도 내가 없으면 집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왔다 말입니다. 그래 왔는데….”
올 3월 그렇게 고향과 부모를 떠났단다. 배가 고파서. 떨리는 목소리는 그는 말을 이었다. “2003년부터는 비배관리(비료·거름) 주었다 말입니다. 2006년까지 비배관리를 주었는데 그때 사정이 조금이 나아졌다 말입니다. 근데 생활이 조금 나섰다는 게 조금이라도 굶은 사람들이 적어지고 도적들이 적어지고. 근데 2007년부터는 비배관리를 안 주었으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이 타락하고. 사람들이 딴딴한 시멘트 바닥을 뒤집어서 곽지(갈퀴)로도 뒤져먹고 강냉이도 심어먹고. 그것도 8월이면 이삭이 조금 달린다 말입니다. 그거 그저 갈아서 먹고. 그때는 감자 있으니까, 한 끼 먹는데 다섯 식구면 감자 5알 정도와 이삭 강냉이 하나 넣는다 말입니다. 하나를 갈아서 대패처럼 갈아먹고 그래서 죽 쒀먹고.”
그는 “올해는 그 정도도 없어 엄청 바쁘다”고 했다. “2월 음력설 전부터 식량이 다 떨어졌다”고도 했다. “산에는 사람들이 영 많습니다. 풀 뜯어 먹느라고. 산에 가서 이런 나시(냉이)라든가 돼지들이 먹는 능쟁이(명아주) 풀이 있습니다. 많이 먹으면 돼지들도 설사한다 말입니다. 그런 풀도 다 뜯어먹고 죽도 해먹고 그렇게 쒀먹고 설사병으로 죽는 사람도 있고,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도 있고….” 그가 떠나온 지 벌써 3개월이다. 상황은 더욱 ‘바빠졌을’ 터다.
“하루라도 서두르면 한명 더 살릴 것”
북한 식량지원 긴급 캠페인 진행 중인 오태양씨 인터뷰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해맑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수줍은 미소도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 달라 보였다. 2006년 6월부터 꼭 22개월 동안 인도 동북부 비하르주 가야시 외곽 둥게스와리에서 달리트(불가촉천민) 주민 지원활동을 하고 돌아온 오태양(34)씨에게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졌다. 돌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에서 40℃가 넘는 더위 속에 2년 가까이 우물을 파고 마을길을 닦았다니…, ‘포스’가 쌓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다.
5월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정토회관 사무실에서 오씨와 마주 앉았다. 그는 말없이 ‘정토회 청년직능국 사무국장·긴급구호단장’이란 직함이 박힌 명함을 내밀었다. 지난 2001년 12월 불살생이란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차마 총을 들 수 없다”며 양심의 명령에 따라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그다. 병역법 위반으로 1년3개월 수감생활을 했고, 낯선 이국땅에서 1년10개월 봉사활동을 했다. 모두 3년3개월을 그렇게 지냈으니 ‘병역의 의무’를 갈음할 만하겠다.
지난 4월 귀국 직후부터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다”고 했다. 사이클론 피해를 입은 버마(미얀마) 지원활동에, 중국 쓰촨성 지진피해 지원사업까지 ‘긴급구호’가 필요한 대형 재난이 잇따른 탓이다. 그리고 ‘북한 식량지원 긴급 캠페인’이 운명처럼 오씨에게 맡겨졌다. 그가 건네준 캠페인 자료에는 ‘너의 배고픔을 알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동포야!’라고 씌어 있었다.
예년과 비교해 올해 북한 식량 사정은 얼마나 나쁜 건가?
=통일부의 추정치로도 100만t가량이나 부족하다. 북한은 배급사회다. 배급체계에서 100만t이 모자라면, 부족한 식량을 어디서 가져올 수 있겠나. 메울 길이 없다. 지난해 큰 수해가 났기 때문에 농업 생산량이 뚝 떨어졌다. 수해 자체도 큰 문제였지만, 그로 인해 식량난이 극심해지면서 벌써부터 굶어죽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50만t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나머지 50만t은 외부에서 지원을 해줘야 한다. 지난해 추수해서 비축해둔 식량은 다 떨어진 상태고, 씨감자 등은 7~8월이나 돼야 수확을 한다.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다. 아사자가 나오고 있는 곳은 대부분 지난해 수해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올해 상황이 나쁠 거라는 건 기실 지난해부터 예견됐던 바다.
대북 식량지원 활동과 인연이 깊은 걸로 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사실 요즘 가슴이 많이 아프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도 나고. 1996년 대학 3학년 때 처음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접했다. 그해 4월부터 <한겨레>가 굶주리는 북녘동포 돕기 모금운동을 했다. 기사를 보면서 매일이다시피 울었다. 어떤 날은 신문을 보다가 너무 눈물이 나서, 타고 가던 지하철에서 내려 역 벤치에 앉아 한참을 혼자 울기도 했다. 친구·선후배와 함께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한 끼 줄이고 한 숨 덜 자면서 한 사람 더 만나면, 동포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외세가 침략한 것도 아니고,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먹을 게 없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당시엔 북한 지원활동에 대한 반감도 많았을 텐데.
=거리에서 모금활동을 하다 따귀를 맞기도 했다. (웃음)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주면 군량미로 쓴다고 얘기하는데, 군복을 입었어도 굶주리는 동포 청년이다. 그들도 먹어야 산다. 이념의 테두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얘기다. 1990년대 중반 식량난 때는 일부지만 북한에 대해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경향도 있었고, 다른 쪽에선 오로지 적대감만 갖고 북한을 바라보는 부류도 있었다. 요즘도 남쪽에선 “먼저 요청해야 준다”고 말하고, 북쪽에선 “먼저 제안하면 받을 용의가 있다”고 맞선다. 10년 전이나 비슷하단 느낌이다.
△ ‘너의 배고픔을 알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동포야!’ 정토회가 마련한 ‘동포의 밥상 체험’ 행사가 열린 5월29일 서울 인사동 들머리에서 한 외국인 여성이 북한 주민들이 먹고 있는 풀죽을 맛보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그래도 대북 인도 지원에 대한 여론은 나아지지 않았나?
=물론 많이 바뀌었다. 남도 북도 마찬가지다. 통일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북한에 수해 등 긴급재해가 발생하면 도와줘야 한다는 여론이 90%가량 나온 것으로 안다.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똑같이 바라볼 필요는 없다. 민족을 넘어 인류적 관점에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는 이웃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한민족이다. 지금 북한 식량난을 돕는 건 결국 우리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긴급 캠페인’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있나?
=오늘 부산항에서 밀가루 200t을 선적했다. 다른 대북지원 단체들도 노력하고 있다. 일단 민간 차원에서 옥수수 1만t을 만들어보려 한다. 1만원이면 옥수수 20kg을 살 수 있다. 이 정도 양이면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을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1만t으로는 20만 명 분도 안 된다. 미국에서 지원 식량이 오기까지 버텨내지 못한다. 핵심은 우리 정부다.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 6월에 접어들면 아사자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하루라도 일찍 지원을 결정하면, 그만큼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식량 20만t을 긴급지원해야 10년 전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정부는 북쪽이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먼저 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는데.
=궁금하다. 정말 상황을 모르고 있는 건지, 알면서도 머뭇거리고 있는 건지. 북한 식량난의 실상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혹 실상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당분간 대북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내부 입장이라도 정한 건가? 미국도 지원하는 판에, 같은 민족이자 통일을 준비하는 사이에 ‘먼저 요청하면 주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더구나 지금 상황에선 정치적으로 우리 정부가 고립될 수도 있다. 북-미가 정치적으로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북한으로선 식량지원도 받기로 한 마당에 미국하고만 대화하면 그만이다. 결국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가장 어려울 때 지원을 안 하고서 나중에 대화하자고 나서면 북이 쉽게 응하겠나? 대북 식량지원은 물론 인도적인 문제지만, 정부로선 정치·외교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란 얘기다.
“사람이 배고파서 죽는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겠다. 굶다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굶어죽는 이가 느낄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까? 북녘 동포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오씨는 이날 아침식사로 동료들과 함께 꽁보리밥과 멀건 소금국을 먹었다고 했다. 점심에는 아침에 먹었던 보리밥 남은 것으로 죽을 쑤고, 밀가루만 조금 들어간 물수제비를 띄워 먹었다. ‘동포의 밥상’을 체험하기 위해 옥수수죽과 시래기죽, 감자 몇 알, 보리밥 등으로 일주일치 ‘메뉴’를 짜놨단다. 옥수수죽만으로 일주일을 버텨보려 했는데, 쌀이나 보리보다 옥수수값이 턱없이 비싸 포기했단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오씨가 다시 맑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