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장엄한 낙조

맑고향기롭게

2010-09-08

장엄한 낙조



1962년 4월 11일 통합 종단 초대 종정으로 추대.

1963년 10월, 통영 미래사에 머물면서 건강이 나타지자 치료차 다시 동화사로 옮겨 66면 5월 13일까지 머물렀다.

이 무렵에는 규칙적인 대중생활을 하지 못했다. 특히 치통으로 많은 고생을 치러야 했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처럼 풀려 시봉들과 장난도 곧잘 했다. 육신의 노쇠에는 어쩔 수 없는 것, 무상하다는 말은 육신의 노쇠를 두고 하는 말인가. 스님은 가끔 &‘파거불행(破車不行)이야&’라고 독백을 하였다.

66면 5월 14일 거처를 대구 동화사에서 밀양 표충사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겼다. 한동안 건강이 좋아졌다가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이 세상 인연이 다해가는 듯싶었다.

누워 있으면서도 입버릇처럼 이따금 &‘무라 무라&’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평생을 두고 참구한 조주의 뭇자 화두다. 노환으로 누워 지내면서도 참구하는 일만은 쉬지 않았다.

입적하기 며칠 전 곁에서 시봉들이 청을 드렸다.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안 남기시렵니까?”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할란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하며 어린애처럼 티없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읊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吾設一切法

都是早?? ??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이것이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이다.

1966년 10월 15일, 음력으로는 9월 초이틀 새벽 세시. 예불을 모실 시각에 스님은,

“얘, 나 좀 일으켜다오.”

라고 하였다. 부축해 드리니 평소에 정진하던 자세로 앉았다. 얼마 있다가

“ 나 오늘 갈란다.”

라고 말하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바른손에 호두알을 굴렸다. 이따금 &‘무라 무라&’ 소리.

오전 열시.

맑게 개인 가을날.

굴리던 호두알이 문득 멈추었다.

표정이 굳어졌다.

마침내 입적(入寂)!

일흔 아홉, 한 수도인의 생애가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가?

재약산 기슭에 은은히 열반종 소리가 메이리쳤다.

물든 잎이 뚝 뚝 지고 있었다.

서울로 운구, 10월 21일 승속(僧俗)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조계사에서 종단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했다.

수유리 화계사 뒤 산자락에서 다비(茶毘)하니, 사리 50여 과와 정골이 많이 출현하여 사후 법문으로 많은 이웃들에게 환희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것은 투철히 닦은 계 ․ 정 ․ 혜 삼학의 결정(結晶)인 듯하였다.

탑과 비를 신도들의 성금으로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세웠다

노산 이은상님은 &‘효봉스님 가신 날&’의 조가(弔歌)를 지었다.


오늘 아침 한조각 구름

서쪽으로 날으더니

굴리던 염주소리 문득 끊어지고

티끌 속 팔십년 인연

그 인연 다해 가시는구려.


마지막 다만 한 마디

&‘무&’라는 말씀 남겨 놓고

가부좌하신 채로 어디로 가시는고

천지에 바람소리만 불어오고 불어갑니다.


불일(佛日)이 꺼진 양하여

어둡다만 하오리까

한가닥 푸른 연기 그마저 사라지고

동산에 달이 오르네

어허, 강물마다 비치리로다.


마지막 다만 한 마디

&‘무&’라는 말씀 남겨 놓고

가부좌하신 채로 어디로 가시는고

천지에 바람소리만 불어오고 불어갑니다.


*여기에 쓰인 자료는 필자가 은사를 모시고 있을 때 보고 들은 사실과 스님 손수 써놓은 출가약력과 안거록, 그리고 같은 문도들로부터 얻어들은 말과 1975년에 간행된 『효봉어록』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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